"국가를 굳게 깨우쳐 밝히고자(開明鞏固) 하는 자는 교육의 필요되는 일(事)을 이 말(此言)에 근거하지 않아도(不據) 스스로 알 것(自知)이니 교육의 필요를 이미 알 것(旣知)인즉 크고 작은 학문(小中大學)의 규모(規模)와 제도(制度)를 완전히 갖추어(完備) 인재를 만들어(作成) 많고 많은(濟濟) 뭇 인재(多士)로 하여금 왕국에 태어나게(生) 함이 국가의 급한 일(急務)이라'''."
"달성학교는 조선인 자제들에게 일본어로 문명 세계의 학문과 예술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히자츠키 마스키치 씨는 일'한 친교를 증진시키고 서로의 오해를 푸는 길은 교육밖에 없다고 간파하고 기존 직업을 내던지고 학교 창립에 전력을 쏟았다…달성학교의 기반이 닦이자 많은 조선인 유지들이 금품을 기부해'''마침내 학교의 기초가 잡혔다."
앞은 고종 임금 시절인 1899년 7월, '사립달성학교창설취지와 교칙'에 나오는 경상도의 첫 근대 교육기관인 달성학교(達城學校) 설립 취지서다. 뒤는 한일강제병탄으로 조선 패망 뒤인 1910년 10월 5일 '일본의 신영토 조선 대구부'의 일본인 미와 조테츠가 일본인을 위해 쓴 대구 입문서 같은 '조선 대구일반'이란 책 속의 글이다. 하나같이 달성학교에 대한 설명이지만 하늘과 땅 차이다.
달성학교는 일제 침탈 야욕에 조선 정부가 교육으로 맞서자 대구의 여러 유지들이 발기인과 찬성원으로 참여해 경상감영에 세운 학교다. 그러다 일제 간섭으로 달성학교의 심상과는 1896년 1월 22일 설립된 대구부공립소학교에 1905년 통합됐다. 달성학교 고등과는 1906년 경북도와 대구사람들이 만든 사립 협성학교와 1909년 합쳐지면서 달성학교는 없어졌다. 대구 소학교는 오늘의 대구초교, 협성학교는 관립'공립 대구고등보통학교로 바뀐 뒤 지금의 경북고로 모습이 달라졌다.
이런 사연은 왜곡됐다. 대구초교는 1906년 '보통학교령' 공포 후 일제 농간으로 설립일을 1906년 12월 21일로 삼았다. 달성학교는 대구의 하찮은 일본인인 히자츠키 마스키치가 조선과 일본의 친교를 위해 세운 것으로 둔갑했다. 대구 첫 일본인으로 알려진 히자츠키는 달성학교 명예고문일 뿐이었다. 미와가 조작한 달성학교 설립자는 뒷날 또 다른 일본인의 책(대구물어)에도 나온다.
있는 사실조차 왜곡한 일본인에게 학교 설립일 조작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교과서 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 등 한결같은 일본의 역사 기만에 등골이 써늘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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