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길 뻔한 저 황금의 끈을①
박창보
1988년 1월부터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첫 국민연금이 시행될 당시 '만 60세가 되면 연금을 얼마나 수령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회사는 소득 월액의 70%를 연금으로 지급한다고 설명했다. 그 당시 우리 한국인의 기대 수명이 70세 정도였으니 오래 살수록 연금 혜택은 늘어나는 셈이었다. 70%…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지 않은가. 월 연금 납입액도 노사가 반반씩 납부하므로 인해 근로자는 그만큼 득이었다.
당시 나는 3공단에 있는 ㅌ광학이란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근무하게 된 배경이 자의로 된 게 아니라 타의에 의해 결정됐다.
나는 비산동에서 세탁소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하절기에 일감이 격감하자 두 달 정도 다른 일로 수입을 좀 올려볼까 하고 신문 구인 광고를 뒤적였다. ㅌ광학에서 낸 생산직 사원모집 광고를 본 후 연마공으로 취업이 확정되었다. 나는 두 달만 근무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했었다. 세탁업이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영업이 되면 수입 면에서 직장인의 봉급을 능가했기 때문이었다.
사원이 240명쯤 되는 ㅌ광학은 안경테 전문 수출업체였다. 나는 안경다리를 광택 내는 자동 연마기란 기계를 맡았다. 근무한 지 한 달이 됐을 때 회사에서 자동 연마기 한 대를 더 맡으라고 권했다. 힘은 들겠지만 그만큼 수입은 늘 것이다. 나는 한 푼 더 벌려고 밤 10시까지 하는 잔업은 물론이고 철야까지 서슴지 않고 일했다. 선적 기일이 급할 땐 휴일에도 출근했다. 급료 형태가 시급제인지라 근무하면 할수록 월급봉투는 두둑했다.
다음 날 회사에서 자동 연마기 한 대를 구입해 와 내가 가동하는 자동 연마기 옆에 설치하고 시험가동했다. 웬일인지 기계가 역으로 회전했다. 먼지가 뒤로 빨려 나가야 하는데 앞으로 밀려 나왔다. 바로 기계 제작회사에 연락하자 사장이 기사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결함 부분을 고쳤다. 말썽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광약과 함께 내 오른팔이 번개같이 롤러 틈 사이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건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돌발적인 사고였다. 내 팔은 심한 화상으로 희멀겋게 완전히 짓물러져 있었다. 돌발적인 사고로 인해 난 본의 아니게 ㅌ광학에 계속 근무하게 되었다.
회사는 책임 회피를 하며 전부 내게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나는 극도로 분노해 노동부 지방사무소에 진정하여 회사 측의 과실을 밝혀냈다. 이 사고로 7개월 넘게 병원 신세를 졌고, 완치 후 노동력이 있을 때까지 ㅌ광학에 근무한다는 근로계약서를 받고 계속 근무해 왔다. 다음해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실태 조사 때 영남대학병원에서 지체 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원래 나는 청각 장애자였는데 사고 당시에 청각 장애 3급 판정을 함께 받았다. 내가 청각 장애인이 된 것은 열두 살 때 오른쪽 다리에 골수염이 발병하여 삼 년간 아홉 번이나 수술받으면서 항생제 과다 투여로 청각 신경이 마비된 탓이었다.
회사에서는 2년간은 잘 대해 주다가 돌변해 괜히 트집을 부리고 작업 부서를 이곳저곳으로 옮기라고 했다. 결국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씌워 징계위원회에 회부시키더니 세 번이나 불법 징계를 열어 해직시켰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던 나는 회사의 불법을 밝혀내어 정당한 손해배상을 받기로 결심했다.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하니, 변호사는 소송이 가능하다며 착수금 100만원과 인지대 40만원을 요구했다.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나는 국민연금을 해지하기로 결심했다. 국민연금뿐 아니었다. 세탁업을 하면서 부었던 1천만원 10년 만기 생명보험과 400만원 종신연금 보험도 함께 해지하기로 했다.
변호사를 선임해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예상한 대로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변호사를 두 번이나 교체하는 등 치열한 법정 투쟁 끝에 1년 만에 힘겹게 승소, 1천200만원을 배상받았다.
내가 청각 장애인이 된 건 어쩌면 일종의 업보인지 모른다. 내 형제는 10남매. 아들 일곱에 딸이 셋, 누가 봐도 부러워할 형제자매들이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인지 건강한 형제들과 달리 유독 나 혼자만 병약한 편이었다. 아버지가 경찰 간부로 계셨기 때문에 생활이 부유한 편은 아니었으나 궁핍한 가정은 아니었다.
나의 첫 번째 불행은 열두 살이던 중학교 1학년 때 찾아왔다. 추석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나는 친척 어른 두 분과 동생 하나, 고종사촌 동생과 함께 본가 뒤에 있는 샘골이란 선영에 벌초하러 갔다. 무슨 액운인지 나는 감나무 중간쯤 올라가다가 감나무에서 떨어졌다.
"빨리 병원으로…." 친척 한 사람이 나를 둘러업었다. 근 두 시간이나 걸려 시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를 업고 왔던 친척 어른의 몸은 땀으로 축축했다. 나는 급히 진찰대에 눕혀졌다. 얼굴이 퉁퉁 부어 오른 내 얼굴은 정말일지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데…." 의사는 그렇게 말하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가망이 없다는 뜻이었다.
내 명(命)이 긴 것일까? 아니면 할머니의 간절하고 애탄 염원이 이루어진 것일까? 사흘째 되는 날 저녁 때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가히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나의 두 번째 불행은 중학교 3학년 초에 일어났다. 아침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 운동장으로 내려가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아기 주먹만 한 돌멩이 한 개가 날아와 나의 오른쪽 무릎을 호되게 내리쳤다.
찾아간 곳이 대구에서 가장 크고 의술이 좋다는 ㄷ병원이었다. 입원 이틀째 한 시간이 넘게 대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병원에서 크게 실수한 게 한 가지 있었다. X-ray 사진을 촬영하니 뼛속에 물이 약간 생긴 상태라고 했으면서도 물이 생긴 문제의 뼈 부위의 제거 수술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연락해 나를 구룡포로 데리고 가 치료를 받게 하였다. 구룡포에서 한 달간 치료를 받았으나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내가 오른쪽 다리에 받은 수술 횟수는 여섯 번이었다. 한 번도 받기 힘든 수술을 14살의 어린 소년이 여섯 번이나 받았으니 고통은 공포 그 자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수술이란 말만 들어도 본능적으로 공포에 떨었다. 죽으면 죽었지 다시 수술을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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