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선의 기회였던 19세기 민중봉기…『민란의 시대』

민란의 시대/이이화 지음/한겨레출판사 펴냄

매주 토요일이면 촛불을 든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고 목소리를 높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한다. 이들의 외침은 대통령 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기득권 세력의 낡은 특권 의식에 저항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런 시기에 '역사를 가장 쉽게 풀어내는 재야학자'로 꼽히는 이이화 씨가 신간 '민란의 시대'를 출간했다. '조선의 마지막 100년'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19세기 조선의 역사를 민중 봉기를 중심으로 재조명했다. 저자는 조선의 19세기를 무법과 혼란으로 얼룩진 과도기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3'1운동, 4'19혁명, 6월 민주항쟁 그리고 지금의 촛불로 이어지는 저항 운동이 태동한 시기로 바라보며 민중의 에너지를 조명하는 데 힘쓰고 있다.

민중의 저항운동이 작은 싹을 틔운 것은 19세기 초. 1800년 6월 정조가 죽자 영조의 계비 정순대비는 11살짜리 증손자(순조)의 뒤에서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조선 후기 '문예부흥'은 채 피지도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서구의 근대혁명이 무르익어간 19세기를 조선은 그렇게 맞이했다. 노회한 정순대비는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주로 정조의 개혁을 중단시키거나 방해하는 정책을 폈다. 정순대비를 감싸고 도는 원로 대신들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는데 바로 노론 벽파 쪽의 정조 반대 세력이었다.

정조 사후 경상도 인동과 하동, 황해도 장연과 곡산, 함경도 북청과 단천 등지의 잇따른 민란'소요가 발생한다. 저자는 당시 조정이 1811년 말 홍경래 난(관서의 난), 삼남의 농민 봉기, 동학 농민전쟁, 그리고 1900년대 초 의병전쟁에 이르는 시기까지 민초들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했다면 나라가 망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저자는 특별히 '홍경래의 난'이라 불리는 관서 농민전쟁에 주목하고 있다.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며 문벌 집단의 차별과 부정을 직접 체감한 홍경래가 차별을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던 평안도 지역의 민중들을 규합하여 봉기한 것으로, 조선 후기 최대 규모였다. 결국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이에 자극받아 크고 작은 봉기들이 계속되었다.

이 시기 관의 위상, 양반의 권위가 추락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현지에 부임하러 가는 수령을 무리 지어 찾아가 구타한다든지 행차 시에 가마를 부수고 종복을 두들겨 팬 뒤 달아나는 일도 있었고, 양반집에 돌팔매질하고 식솔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 화적떼가 출몰하여 관가를 습격'약탈했고, 방화 사건이나 무기 절도도 빈발했다.

높아진 민중 의식은 1862년 삼남 농민 봉기로 물꼬를 텄다. 지리산 밑자락에서 시작된 봉기의 불씨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라도에서 충청도로 옮겨 붙으며 추수기에 들어서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0월 함경도 함흥, 12월 황해도 황주에서의 봉기 기록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봉기들은 다른 마을과 유기적으로 연계된 것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봉기했다는 소식에 고무되어 자신들도 분노를 표출한 것일 뿐이었다.

고양된 민중 의식이 정치적으로 표출된 것은 1894년 동학 농민전쟁에 이르러서다. 동학 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사상과 교단 조직을 이용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동학 교도와 민중이 연합한 결과로 19세기 민중 역량의 총집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군대의 개입으로 동학 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해인 1895년부터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질 때까지 민중의 저항은 항일 의병 형태로 나타났다. 초기 중심 세력은 전통 유림과 동학 농민 세력 그리고 개화 세력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 사이에는 미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되었다. 전통 유림은 신분제 철폐 등을 외치는 동학 농민 세력과 묵은 봉건 체제를 손보자는 개화 세력을 아군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대립 관계 속에서 의병의 사기는 유지되기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봉건 질서를 고수한 유림 의병장들이 주도권을 잃고 신돌석, 안규홍 등 평민 의병장이 등장하면서 의병 활동은 다시 활기를 띤다. 이들은 애국이나 위민 같은 가치보다는 일본의 이권 침탈과 미곡 유출 등 생존권 문제에 더 민감했고, 이런 구체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춰 더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1908년 13도 연합 부대의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신돌석, 안규홍 등도 살해되고 만다. 1909년에는 1만7천여 명의 의병이 살해됐다는 자료도 보인다. 이렇게 민중의 저항운동은 결실을 보지 못한 채 1910년 한일병합을 맞았다. 284쪽, 1만5천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