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대표 신도시 '시지', 1600년 전에도 신도시였다

국립대구박물관, '고대 마을, 시지' 발간…옥산 가마터는 부장품 토기 생산지

4~6세기 대구 수성구 시지지역의 가마터 유적은 대구시 전역은 물론 성주까지 유통될 정도로 대규모를 자랑한다. 1990년대 시지지역 유적 발굴 모습.
4~6세기 대구 수성구 시지지역의 가마터 유적은 대구시 전역은 물론 성주까지 유통될 정도로 대규모를 자랑한다. 1990년대 시지지역 유적 발굴 모습.
시지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
시지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

'때에 이르러'의 뜻을 가진 수성구 '시지'(時至)는 선사시대부터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최근 국립대구박물관에서 '고대 마을, 시지' 특별전 도록을 발간하면서 학계는 물론 시민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갑작스럽게 세상 밖으로 나온 시지 유적, 이 신도시 출현은 이미 1천600여 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의 데자뷔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신도시 출현은 우연이 아니고 삼국시대에 벌써 예견돼 있었다는 얘기인데, 그 흥미로운 스토리를 찾아 대구시 동쪽마을을 돌아봤다.

◆옥산가마터는 당시 국가산업단지=4세기 중반 시지지역엔 대규모 신도시가 들어선다. 당시 수장층이었던 경산 임당 세력이 건설한 부락이었다. 도시는 지금의 욱수, 시지, 노변동을 따라 형성되었고 대규모 가마터가 같이 들어왔다. 여기서 생산된 토기는 국읍(國邑) 이 있었던 임당지구를 비롯해 시지, 불로동, 복현동, 달성군 성산리'문양리는 물론 성주 명포리까지 공급되었다. 시지 가마 터는 왕경이었던 임당 세력의 지배 아래 토기를 생산하던 국가산업단지였던 것이다.

그러면 신도시에 입주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 단서를 풀기 위해서는 당시 분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4~6세기 당시에는 돌덧널무덤이 주 묘제였다. 이 묘는 부장을 특징으로 하고 무덤방이 넓고 깊어 많은 물건이 들어갈 수 있다.

시지 일대서 2천여 기의 분묘가 조사됐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장례와 관련된 부장 산업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시지에 입주한 사람들은 부장품 토기를 생산하는 장인집단이었던 것이다.

◆대규모 생활유적으로서의 특징=시지 유적은 발굴보고서만 120여 권에 이르는 단일 유적으로는 최대 규모다. 그럼에도 학계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화려한 부장(副葬) 유물이 있는 왕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지 유적은 대규모 생활유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건물지와 수혈 유구는 물론 우물, 도로, 제의(祭儀), 기둥구멍, 수로시설은 물론 부뚜막, 온돌시설까지 조밀하게 배치돼 4~6세기 촌락의 실상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대구박물관의 장용준 학예연구실장은 "삼국 초기 촌락 주민들의 의식주와 농경, 제례 등 일상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획기적 자료"라고 평가했다.

◆6세기 후반 이후 쇠락의 길로=6세기 후반 이후 시지지역의 취락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전문가들은 가장 큰 이유로 매장 관습의 변화를 든다. 그 무렵 주요 장제였던 돌덧널무덤이 돌방무덤으로 바뀌면서 부장품 수요가 급속하게 줄었기 때문이다. 토기를 대량으로 만들어야 할 산업적 이유가 사라지면서 장인 집단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자연스레 취락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시지는 1990년대 대규모 택지개발 사업과 함께 대구의 신도시로 다시 떠올랐다. 1천600년 전 임당 세력의 국가산업단지였던 마을이 21세기에 대구의 신도시, 베드타운으로 돌아온 것이다. '때에 이르러'(時至) 라는 도시 이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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