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에 유례가 드문 천 년의 왕국 신라가 막을 내린 지 다시 천 년이 지나서야 '신라 천 년의 역사와 문화'란 이름으로 신라사 30권이 간행되었다.
이 중 제16권이 '신라의 언어와 문학'이다. 신라의 문학은 한자로 기록된 신라한문학, 구전되다가 후대에 기록된 구비문학, 향찰로 기록된 향가문학이 주를 이루는데, 여기서는 한국 시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향가문학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향가는 한자를 차용한 향찰문자(표기법)로 우리말을 기록한 신라시대 시가 작품들을 총칭한다. 향가문학은 우리나라 시가문학 사상 최초의 정형시로, 장형인 10구체(10행시), 8구체(8행시), 4구체(4행시)가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배경설화를 가지고 있기에 역사적, 서사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의 향가 작품과 '삼대목' 등의 향가 작품집들이 전해오지 않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자의 음(音'소리)과 훈(訓'뜻)을 차용해 우리말을 표기한 향찰의 발명은 인류문화사에 있어 대단한 업적이다. 한자를 사용하여 자국어를 표현하려는 의식은 이웃인 일본과 중국의 소수민족 백족(白族), 베트남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자를 차용한 향찰식 표기법은 동양 문자 발달의 한 양식이 되어 일본의 '만엽집'을 표기한 만엽가나로, 백족의 백문(白文)으로, 베트남의 쯔놈문자로 발달하였다.
일본의 '만엽집'엔 4천여 수의 노래가 전하나 우리의 향가는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보현십원가' 11수가 전할 뿐이고, 진위 여부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 실린 미실의 '풍랑가' 1수, 그리고 고려시대 예종이 김낙과 신숭겸 두 장군을 추도한 '도이장가'(悼二將歌) 한 수를 더 보탤 수 있다.
신라시대의 언어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작품이 많이 남아 전하는 일본에서조차 만엽가 해독이 완전하지 않으니, 20여 수밖에 전하지 않는 우리 향가 작품의 해독 또한 아직 논란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하는 향가 작품들은 대부분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원에서 창작되었으니 그 언어 또한 신라어, 곧 경상도어로 해독함이 마땅할 것이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향가 작품들을 보면, 600년 전후 진평왕 시절에 선화공주를 얻고자 맛동(백제 무왕?)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서동요'와 융천사가 지은 '혜성가'가 있고, 7세기 선덕여왕 때 '풍요', 문무왕 때 '원왕생가', 효소왕 때 득오가 화랑 죽지랑을 그리워하며 지은 '모죽지랑가'가 있다. 8세기에 가장 많은 향가 작품이 창작되었는데, 성덕왕 때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수로부인을 위하여 꽃을 바치며 '헌화가'를 불렀고, 효성왕 때 신충이 임금을 원망하여 '원가'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다.
경덕왕 때 월명사가 일찍 타계한 누이를 위해 '제망매가'를 짓고, 조원전에서 '도솔가'를 지어 하늘에 두 해가 나타난 재앙을 물리쳤다. 충담사는 일찍이 화랑 기파랑을 추모하는 '찬기파랑가'를 지었으며 경덕왕의 요청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노래 '안민가'를 지었고, 다섯 살 된 아이와 어머니(희명)가 아이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분황사 관세음보살에게 '도천수대비가'를 지어 기도했다. 또한 지리산으로 가던 영재 스님이 도적들을 만나 '우적가'를 지어 그들을 불교에 귀의하게 하였다. 9세기에는 울산 개운포에서 헌강왕을 따라온 처용이 '처용가'를 불러 역신을 물리쳤다. '균여전'에 실린 향가로는 고려 초 10세기에 균여 대사가 불교 포교를 위해 지은 '보현십원가' 11수가 있다.
경주시에서는 '신라의 문학'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계획하고 있다. 향가는 한국인의 문학과 음악, 무용, 민속 등 한국 예술의 기원으로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야 할 문화 콘텐츠의 보고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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