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길 뻔한 저 황금의 끈을②
박창보
운명의 여신은 끝까지 나를 괴롭혔다. 2년이 넘는 동안 앉은뱅이 생활로 힘들게 투병하여 다리가 완치되어 갈 즈음이었다. 두 귀가 청각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이비인후과에서 진찰을 받았다. 다리 수술을 받고 치료 중 항생제 주사를 과다하게 맞은 부작용으로 청각 신경이 마비되었다는 거였다. 수술도 불가능하고 완치도 어렵다고 했다.
나는 가까스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신체적인 열등감과 가정적인 어려움(당시 부친께서 안동경찰서 형사계장으로 계셨으나 4'19혁명 때 관직에서 물러 나왔음)으로 인해 나에 대한 식구들의 관심은 더욱 희박해져 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두 달가량 학교에 다니다가 학업을 포기했다. 가세(家勢)가 기울어진 탓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점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청각장애인인 관계로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점이 첫 번째 이유였다.
이때부터 나는 책을 가까이했다. 투병 생활 때도 만화책을 좋아했던 나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취미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독서에 심취했으나 독서량이 늘어나자 글을 써보면 안 될까 하는 엉뚱한 의욕에 사로잡혔다.
'나도 글을 한번 써 보자.' 그렇게 결심하고 습작을 시작했다. 최초로 완성한 작품은 원고지 200매 정도의 중편소설(꿈속의 女人)이었다. 내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모 일간지 신춘문예 모집에 응모했다. 뜻밖에도 예심을 통과해 본심에 올라갔지만 결국 탈락했다. 박창보란 이름 석 자가 실린 신문지를 움켜쥐고 종일 길거리를 배회했다. 좀처럼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운명의 여신은 무슨 원수가 졌는지 끝까지 나를 괴롭혔다. 그해 여름 나는 또 오른쪽 다리를 수술해야 할 위험에 처한 것이었다. 대구 칠성동에 있는 고무공장에서 공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7월 어느 날 작업 중 기계 모서리에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부딪쳤다. 아버지가 관직에 계실 때 알고 계시던 정형외과에 나를 데리고 가서 수술을 받게 해 주었다. 일곱 번째 수술이었다.
1970년, 나는 두 번째 매일문학상 현상 공모에 400매 분량의 중편소설(원죄의 길)을 응모했다. 문장력 미흡으로 본선에서 탈락했다. 신문 문학상에 응모한 것을 계기로 참으로 귀한 문우(文友) 두 사람을 만났으니 대단한 행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나는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하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했다. 중편소설, 장편소설에만 과욕을 부린 나머지 단편소설을 소홀히 한 데 원인이 있었다. 일단 작가 지망생이라고 하면 단편소설부터 인정을 받고, 중'장편소설에 손을 대야 할 형편인데 정반대의 방법을 택했으니 실패를 거듭한 건 당연했다.
한때 추리소설에 심취한 나머지 장래 훌륭한 추리소설가가 되겠다는 엉뚱한 망상에 사로잡혀 추리소설을 쓴답시고 원고지와 씨름한 적이 있었다.
추리작가란 일단 문예작가로 등단한 후 진출할 수 있었지만, 난 등단도 못 한 주제에 추리소설을 쓴답시고 허욕을 부렸으니 대성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어찌 되었던 모 잡지에 1년간 중편 추리소설을 연재하는 행운을 안았으니 완전 실패는 아니었다.
나이 삼십이 되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니 작가가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점점 멀어져갔다. 생활에 쪼들려 보니 창작 같은 건 일종의 사치 같았다. 호구를 위해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우연히 세탁업을 접하게 되었고, 그 일이 본업으로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창작과 담을 쌓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내 오른쪽 눈에 '백내장'이란 질환이 상당히 진행 중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운명의 여신의 희롱은 너무 혹독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수술과 무슨 숙명적인 원념(怨念)을 졌는지 수술이란 올가미는 끝까지 나를 찾아와 내 목을 조였다.
1990년 6월 나는 두 번째 취업을 했다. 근로자가 25명인 ㅁ섬유란 봉제업체였다.
ㅌ광학과 1년간 법정투쟁을 벌여 가까스로 승소했으나 소송에 매달렸던 터라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아내와 의논해 세탁소를 처분하고 직장 생활을 하기로 했다. 세탁 기술이 있으므로 취업은 쉽게 될 것 같아서다. 그러나 이 업체는 2년 후 부도로 폐업했다. 월급은 50만원을 받고 있었으나 퇴직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1993년 8월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세 번째 직장을 구했다. 중리공단에 있는 ㅇ섬유란 봉제업체다. 사원이 30명쯤 되었다. 이 공장은 주로 T셔츠를 생산해 미주 지역 쪽으로 수출했다. 난 역시 미싱과 아이롱 작업을 했다.
이 업체에서도 오래 근무하지 못했다. 6개월 후인 다음해 2월 업체를 퇴직했기 때문이다.
1994년 4월 네 번째 직장을 구했다. ㄷ산업이란 봉제업체였는데, 사원이 150명쯤 되는 중견 업체로 바바리코트, 점퍼, Y셔츠 등을 생산해 국내에 판매하는 회사였다.
난 역시 아이롱 숙련공으로 취업했다. 그러나 이 업체도 ㅇ섬유보다 작업량이 더하면 더했지 적은 편은 아니었다. 결국 혼자 작업 물량이 쌓여 쩔쩔매는 형국이 됐고, 급기야 실장 눈에 자주 찍혀 다른 부서로 보내기에 스스로 그만뒀다. 약 20일 근무한 셈이었다. 그런데 운 좋게 한 달 봉급이 아니었지만 한 달 급료가 60만원으로 책정되어 국민연금 3만6천원이 납부되고 있었다.
다섯 번째 직장을 구했다. 지금까지 근무한 회사 중에 가장 적성에 맞는 직장이었다. 그러나 좋은 일에 마가 끼듯 이 회사도 경영난으로 부도 처리되었다. 비록 받지 못했으나 국민연금이 한 달도 거르지 않고 꼭꼭 납부되었기에 난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난 다시 6번째 직장을 구했다. 1년 만에 퇴사했다. 회사는 퇴직금으로 한 달 월급인 80만원을 지급해 주었다. 대단히 양심적인 업주였기에. 거기다 국민연금도 12개월 납부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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