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걸립패가 들이닥쳤다. 새끼줄을 매단, 깃대를 든 남정네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나는 얼른 방방이 문을 열어젖힌다. 큰아이와 작은아이도 들뜬 표정으로 방문을 연다.
우리 집에 언제 이렇게 많은 이웃이 왔었던가. 사람 사는 집에, 사람 소리가 나야 제대로 된 집이라던 이웃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우리 집은 지금 흥에 겨워 있다. 열댓 명 남짓한 걸립패가 들어서니 온 집안이 야단법석이다.
우리 집은 지금, 정초에는 온 집안을 한바탕 떠들썩하게 해야 바깥의 액운이 집 안으로 미치지 못한다는 세시풍속을 치르는 중이다.
징과 북, 꽹과리 소리가 땅과 하늘까지 닿도록 거하게 놀고서야 멈췄다. 상쇠가 거실에 차려진 제상 앞으로 나온다. 대주인 남편이 쌀 그릇에 꽂힌 초에 불을 붙이고, 두어 번 절을 올리자 상쇠의 고사축원이 이어진다. 한 해 동안 이 집안에 액운이 들지 않도록 좋은 기운을 북돋아 달라며 터줏대감과 여러 신에게 고하는 말인 듯싶다.
고사축원이 끝나자 다시 요란하게 풍물이 시작되고, 남편은 쌀과 봉투 하나를 새끼줄에 엮는다. 물이 오른 걸립패들은 거실을 몇 바퀴 돌고서 큰방, 작은방, 부엌, 화장실, 창고까지 온 집안을 벌집 쑤시듯 휘저은 후에야 대문을 나선다. 오랜만에 집안에 화색이 돈다. 간소한 상차림과 간소한 의식 속에 우리의 일 년 치 액막이가 모두 해결되었으리라.
양말 공장에서는 양말 두어 묶음을, 과일상회에서는 과일 몇 소쿠리를, 노령연금을 받아 근근이 생활하는 노인은 천원짜리 지폐 두어 장을 내어 놓고 걸립패들을 불러 액막이굿을 했다.
걸립패들은 액막이굿을 원하는 집이면 일정한 금도 없이 어디든 찾아들었다. 온 종일 이집저집 신명나는 소리로 동네가 들썩였다. 까마득히 먼 옛날의 '쓰잘데기 없는 미신' 즈음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액막이를 했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일 년 내내 한결 가볍고 평안하리라.
문명의 밝은 불빛 아래 사는 우리. 우리는 살면서 과연 얼마나 달을 올려다볼까. 바쁘고 지친 삶 속에, 우리의 어머니들이 그토록 간절히 소원을 빌던 보름달의 의미를 우리는 얼마나 알까. 선조는 또 하나의 명절로 여겼다던 정월 대보름. 비록 그 의미는 바래지고 희석되었다지만, 문명의 뒷골목에선 아직도 세시풍속을 행하며 마음을 다잡는 소박한 이웃들이 있다.
삭막해진 세상 속에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고, 불안한 마음을 대신 풀어주는 액막이굿을 보며, 맑고 부드럽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조상의 메시지를 읽는다. 오늘은 이웃들과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가가호호 인사를 나누었던 것 같다.
나는 질문이 많아진 작은아이를 업고 도란도란 정월 대보름을 이야기한다. "망월(望月)이야~ 망월이야~ 망월이야~" 빈 하늘을 향해, 21세기 아이가 목청껏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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