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프로 칼럼니스트의 탄생

우리 대학의 몇 분 교수님들과 함께 꼬박 열두 시간이 넘는 긴 여정을 거쳐 이곳 캄보디아 뿌삿 지역에 도착한 것은 새벽 3시쯤이었다. 몇 시간 눈을 붙이고 그리스도 교육수녀회 수녀님들께서 봉사하시는 시골 마을과 학교를 찾아갔다. 어느 방송사 여행 프로그램에서 봤음 직한 대나무 기차를 타고 가는 길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장쾌한 폭포나 기암절벽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되, 먼지 풀풀 날리는 황톳길과 기차길 옆 오막살이와 코코넛 나무 밑을 서성이는 소 떼들은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내전의 깊은 상처도 어쩌지 못한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만난 이들의 순박한 웃음과 눈매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년에 있을 우리 대학병원의 정기 해외봉사를 준비하는 전초작업이면서 현지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의약품을 전달하려고 나선 길이었기 때문에, 우리 팀의 구성과 준비는 단출할 수밖에 없었다. 따로 출장비를 받아 온 것도 아니라서 풍성한 선물을 가져오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워낙 의사를 만나기 힘든 주민들은 마치 구세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처럼 기대하는 눈치다. 수녀님들은 그런 주민들을 한 분이라도 더 우리 일행과 만나게 하려고 애를 쓴다. 어쩌랴. 우리 교수님들이 급하게 진료소 비슷한 방을 차리고 환자들을 맞았다.

그중에 열여덟 살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손목이 아프다고 한다. 말을 못하는 농아라 몇 단계를 거쳐 알아보니 닷새 전에 넘어지면서 손을 짚었는데 이후로 계속 아프단다. 게다가 딸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는 왼쪽 안구가 없는 장애인이다. 한 달을 쉼 없이 일해도 150달러를 벌기 힘든 아버지는 아이의 아픈 손목에 뭔가를 덕지덕지 발라서 데려왔다. 마치 옛날 우리 어른들이 된장을 발랐듯이.

얼른 보기에도 팔이 굽어 있는 것이 손목 골절 같은데 우리 팀에는 엑스선이 없고 외과 수술을 할 수도 없다. 환자를 주의 깊게 보신 이 교수님은 현지 병원에 보내서 사진을 찍고 다음 조치를 해야 한다는데 아버지는 물으나 마나 한 대답밖에 할 것이 없다. "돈이 없어요." 빨리 치료를 받지 않으면 나중에 손을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엄포를 놓지만, 먹고 죽으려도 돈이 없는 아버지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놈의 가난 때문에 부녀가 동시에 말을 잃었다.

보다 못해 병원비는 우리가 지불할 테니 내일 아침에 바로 병원으로 보내자고 했다. 통역하던 수녀님은 예산을 얼마나 쓸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사실 책정된 예산은 없다. 교수님들이 주머니를 털어 의약품이며 기구를 마련해 왔는데 이런 돌발 상황에 쓸 돈이 따로 있겠는가. 잠시 망설이고 있으려니 갑자기 한국에서 문자 메시지가 온다. 신문사에서 온 원고 청탁이다. 옳거니! 원고료 받으면 이 아이 치료비는 해결이다! 호기롭게 수녀님께 큰소리를 쳤다. "내일 아침에 보냅시다!" 바로 예약이 잡히고 교통편에 봉사자까지 구해졌다. 안심이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세상에는 돈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는, 그것도 큰돈이 들지 않는 딱한 사정들이 꽤나 있다. 오늘은 그래서 이 칼럼을 쓴다. 프로 칼럼니스트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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