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인간을 이해하는 지혜이자, 현실을 비추어보는 거울이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김유신은 신라인에게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높이 받들어졌다. 그러나 20세기 초의 민족주의자 신채호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외세를 끌어들인 결과라고 비판했다. 과연 김유신은 비자주적 사대주의자였을까?
사비성이 함락된 뒤에 당나라가 신라까지 넘보려는 기색을 드러내자 무열왕은 회의를 열었다. 한 신하가 "신라인에게 백제 옷을 입혀 당군과 싸우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무열왕은 "우리를 도우러 온 쪽과 싸우면 하늘이 도와줄까" 하고 망설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김유신은 "기르던 개도 주인이 발을 밟으면 무는 법이니, 자구책을 취해야 한다"며 이 말대로 하자고 거들었다. 삼국시대 사람들에게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은 없었다. 민족개념이 생긴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신라는 자국이 살아남기 위해서 당나라와 손을 잡았지만, 당이 신라를 넘보자 다시 7년 동안 쉽지 않은 전투를 치르며 당군을 몰아냈다. 김유신 등의 발언은 그런 결기를 잘 드러낸다.
한편, 신라 귀족들은 나라에 대한 충성을 입으로만 떠들지는 않았다. 김흠운은 성을 지키다가 한밤중에 백제군의 기습을 받았다.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한 부하가 몸을 피하기를 권했다. "야간 전투에서 당신이 죽어도 남들이 알지 못한다. 더구나 당신은 진골이며 왕의 사위가 아닌가!" 그러나 그는 "대장부가 나라에 몸을 바친 이상, 남이 알거나 말거나 굳이 명예를 바라겠느냐"며 힘써 싸우다 전사했다. 높은 귀족들의 솔선하는 태도는 아랫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김유신은 백제군과 싸우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하 비령자를 불러서 이렇게 말한다. "찬 겨울이 되어야 송백(松柏)의 절개를 안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사람들을 격려하겠는가?" 이 말을 들은 비령자는 나라를 위해 죽으리라 결심한다. 그리고 합절이란 종을 불러 "아들 거진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여 돌아가서 어미를 위로하라"고 일러두고 장렬한 죽음을 택한다.
이를 본 거진이 적진으로 향하자, 합절이 부친의 당부를 전하며 말고삐를 놓지 않았다. 그러나 거진은 "아비의 죽음을 보고 구차히 사는 것이 효자냐?"며 합절의 팔을 칼로 쳐버리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전사하였다. 합절도 "주인이 다 죽었는데 홀로 살아서 무엇하겠느냐"며 싸우다 죽었다. 이 광경에 감동한 신라군은 다투어 진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신라 귀족이 전장에서 보인 솔선수범의 백미는 유명한 화랑 관창이다.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김품일은 아들 관창을 불러 공을 세우라고 권한다. 연거푸 뛰어든 관창을 사로잡은 계백은 그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달아 신라 진영에 돌려보냈다. 계백의 이 조치는 적장을 정중하게 예우하는 것이었다. 김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왕을 위해 죽었으니 후회가 없다"고 했다. 이를 본 신라군이 비분강개하여 백제군을 크게 이긴 것이 황산벌 전투이다.
이런 사례들은 갖가지 명목으로 병역을 피한 이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입으로 안보를 들먹이는 우리 상황과 대조적이다. 신라 멸망의 배경 중 하나로 진골 귀족의 탐욕을 꼽기도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수세기 이전의 통일전쟁 과정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결여된 것을 그들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 말 경상북도에서 5년간 공들인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전 30권)가 발간되었다.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게 만든 책이며, 경상북도 누리집에서 웹서비스를 시작했다. 무료로 내려받아 읽을 수 있으므로 국민 모두가 지식과 문화적 상상력을 누릴 발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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