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매화 보고 싶어 말을 타고 달려가다 李滉(이황)
망호당 처마 밑의 한 그루 매화나무 望湖堂下一株梅(망호당하일주매)
몇 번이나 봄을 찾아 말을 달려왔나 몰라 幾度尋春走馬來(기도심춘주마래)
천 리 고향 떠나는데 아니 보고 어이 가랴 千里歸程難汝負(천리귀정난여부)
문 열고 달려 들어가 그와 다시 취했노라 敲門更作玉山頹(고문갱작옥산퇴)
*원제: 望湖堂 尋梅(망호당 심매): 망호당으로 매화를 찾아감
1570년 12월 3일, 선생께서 이질에 걸려 설사를 하셨다. 때마침 화분의 매화가 바로 옆에 있었다. 선생께서 '다른 데로 옮기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깨끗하지 못한 몸으로 매형(梅兄)을 대하려고 하니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그렇다." 12월 8일 아침, 선생이 말씀하셨다. "저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어라." 그날은 날씨가 화창했는데 유시(酉時)에 접어들자 갑자기 흰 구름이 모여들더니, 지붕 위에 눈이 내려 한 치쯤 쌓였다. 잠시 후에 선생이 '누울 자리를 정돈하라'하셔서 부축하여 일으키자, 앉으신 채로 돌아가셨다. 그러자 문득 몰려왔던 구름이 흩어지고 내리던 눈이 뚝 그쳤다.
널리 알려진 대로, 퇴계(1501~1570) 선생의 임종 장면을 스케치한 '고종기'(考終記)의 일부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 이 지상에서 맨 마지막으로 하셨던 일 가운데 매화와 관련된 것이 둘이다. 왜 그랬을까? 무려 100수가 넘는 매화 시를 후대에 남길 정도로 매화를 아주 각별하게 사랑했기 때문일 터다. 위의 시는 그 가운데서도 매화에 대한 퇴계의 사랑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1541년 3월, 퇴계는 책을 읽기 위한 특별 휴가를 받고, 한강 가에 있었던 독서당(讀書堂)에서 책읽기에 전념하고 있었다. 바로 그 독서당의 부속 건물인 망호당 처마 밑에는 아름다운 매화 한 그루가 있었고, 선생은 그 매화를 매우 사랑했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간 뒤에도 선생은 망호당 매화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봄이 돌아와서 매화가 필 때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 고운 매화를 보려고, 이랴 이랴 말을 몰아 내달려갔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요즘 같으면 그때마다 난데없는 과속 스티커가 두어 장씩 한꺼번에 날아왔을 게다.
1545년 피비린내 나는 을사사화를 계기로 하여 물러날 뜻을 다잡은 퇴계는 그다음 해 2월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때가 바로 망호당 매화가 꽃망울을 툭툭 터뜨리는 봄! 그 고운 임을 아니 보고서야 차마 어찌 서울을 떠나랴. 다시 다급하게 말을 타고 달려가, 주거니 받거니 그 임과 대작을 하다 보니 크게 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성리학자로서의 냉철한 이성과 함께 2천 수가 훨씬 넘는 한시를 남긴 시인으로서 뜨거운 감성과 도저한 풍류를 아울러 지녔던 희대의 로맨티시스트 퇴계 선생!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는 교정의 매화나무 아래로 선생을 모시고, 우주와 인간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은 봄날인데,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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