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잔뜩 내려앉았다. 안개 낀 풍경처럼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아침을 연다. 빛은 어디까지 달려갔는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다.
그림자가 생기는 자리는 항상 빛이 비치는 지점의 반대쪽이라 했던가. 그림자는 빛과 가까울수록 빛을 먹고 쭉쭉 자란다. 구부러질 수 없는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양의 그림자가 생긴다. 타협을 모르고 구부러질 수 없는 것은 그늘을 만드는가.
제임스 볼드윈은 "작가라면 누구나,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이 모두 한패가 되어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라고 했다. '오만과 편견'의 저자 제인 오스틴은 그녀의 소설 '맨스필드 파크'가 출판되었을 때 주변의 논평 때문에 낙담하였다. 바로 출판이라는 빛이 주는 그림자와 직면한 것이다. 그러나 낙담한 그녀가 한 일은 훗날 걸작이 될 소설 '에마' 쓰기였다.
이반 일리치는 산업사회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보완물로 요구되는 무급 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 말한다. 여자들이 집에서 하는 대부분의 가사 노동, 장보기, 학생들의 벼락치기 시험공부, 직장 통근, 관(官)에 대한 순종, 강요된 일을 하기 위한 준비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남성은 노동계급에 주어진 소명을 마음껏 누리도록 권장된 반면, 여성은 사회의 자궁(24시간 일하는 걸어다니는 자궁)으로 은밀하게 정의되었다고 한다. 여성은 더욱 그림자 상태에 노출되기 쉬운 것이다.
빛나는 작가의 뒤에 가려진 그림자로, 승승장구하는 남편의 그림자로, 출세가도를 달리는 친구의 뒤만 따르는 그림자로, 부유층의 배만 불리는 그림자로 느껴져 기운이 빠지는 때가 있을 것이다. 거대한 인생의 그림자가 우리를 잠식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햇빛을 마주한 화분에는 선명하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하지만 유리 어항에는 그림자가 사라지고 없다. 유리가 빛을 모두 놓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완전히 떼어낼 수 없다면 어떻게 그림자와 화해할 것인가. 마음의 굴곡이 그림자를 만들어낸 것이라면 결국 유리처럼 스스로 투명해지는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귀를 기울여 나를 맑고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 유리가 되어 빛을 통과시켜 버려야 빛을 따르는 그림자도 벗어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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