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여 시위를 했다. 이 사건은 사실 사회운동의 다른 사례들과 비교하면 그 규모나 지속 시간, 치열함 등에서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대구시내 공립고등학교 학생 일부가 한나절 정도 항의 행진을 하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된 것이 전부다.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이런 정도의 저항 시위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대구는 왜 이것을 2'28민주운동이라 부르며 대구의 정체성으로까지 선양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한 가지다. 선도성(先導性) 때문이다. 2'28민주운동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첫 번째 저항운동이었다. 식민지 지배, 분단국가, 전쟁에 이어 이승만 독재체제하에서 모두들 체념적 순종(resigned submission)에 빠져 있을 때 대구에서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렇다 할 시민사회 세력도, 믿을 만한 정당도 존재하지 않은 어둠 속에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첫 번째 목소리가 대구에서 터져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을까. 1960년 2월 28일 저항 시위 준비를 끝내고 친구의 자취방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새벽을 맞이하던 대구의 까까머리 소년들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역사의 무게는, 1980년 5월 도청에서 마지막 새벽을 맞이하며 진압군 장갑차의 캐터필러 소리가 가까워 오는 것을 듣고 있던 광주 소년 시민군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역사의 무게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 공포를 이기고 일어선 용기, 정의감, 희생정신이 정부수립 이후 첫 번째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만든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십자가'라고 한다면 1960년 2월 대구민주운동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횃불'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가 처절한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횃불이란 어둠과 두려움을 뚫고 일어서는 선도성의 표상이다.
2월 28일의 횃불은 3월 15일 마산으로 이어졌고, 4월에는 서울에 상륙하여 4월 19일 절정에 이르렀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이것이 4월 혁명이다. 따라서 2'28은 4월 혁명의 도화선이라고 하기보다는 4월 혁명의 '출발'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2'28은 혁명을 일어나게 한 하나의 계기 정도가 아니라 혁명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이다.
대구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4월 혁명이라는 말도 마뜩잖은 점이 있다. 4월 혁명이라고 하면 우선 서울을 떠올린다. 그것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특히 대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4월 혁명이라고 하면 대학생들만 생각한다. 대구에서처럼 고등학생들이 앞장섰다는 사실을 유념하지 못한다. 1960년 2월 대구에서 출발한 혁명운동이 3월 각 지방으로 그 불길이 번져나가 4월에 서울에서 결실을 맺었다는 점에서 어떤 사회학자는 4월 혁명이라는 이름을 '1960년 봄 혁명'으로 바꾸어 부르자고 한다. 그래야 1960년의 혁명운동을 개념적으로 오롯이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1960년의 혁명운동이 대구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우리로서는 4월 혁명(the April Revolution)이라는 이름 대신 1960년 봄 혁명(the Spring Revolution)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1960년 봄 혁명'의 '출발'을 기념하는 2월 28일에 대구시민주간의 모든 행사가 절정에 이르도록 마무리한 것은 참 잘한 기획이다. 대구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횃불을 정체성의 표상으로 삼은 것은 우리들에게 큰 자부심을 가지게 하고 우리 지역사회를 훨씬 더 역동적으로 만들 것이다. 대구시민주간은 봄을 여는 축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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