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경주 최부잣집 육훈(六訓)

10여 대 400년 가까이 만석꾼으로 불렸고, 해방 후에는 교육 사업을 위해 전 재산을 기부했었던 경주 최부잣집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특이한 부자였다. 일단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속담과는 달리 오랜 세월 동안 부자였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거기다 전 재산을 대학(현재 영남대, 영남이공대)을 설립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기부했지만, 재단에 개입하지도, 이권을 챙기려고도 하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예외적이다. 부자이면서 두루 존경을 받는 부자로 이름이 남아 있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최부잣집이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바탕에는 '육훈'(六訓) '육연'(六然) '가거십훈'(家居十訓)과 같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중 '가거십훈'과 '육훈'은 모두 좋은 말이지만 그 말들의 느낌은 조금 다르다. '가거십훈'은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한다. 임금을 사랑함에 충성을 다한다. 형제 사이에는 우애가 있다. 친구 사이에는 신의가 있다.' 등 삶의 기본 원칙이다. 추상적인 원리를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좋은 말이지만, 너무나 흔한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최부자 집안 사람이 아니라면 가슴에 와 닿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 지침과도 연결이 잘 안 된다.

'육훈'은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2.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5.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6.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은 사람이 없게 하라.'이다. '육훈'은 대대로 내려오면서 하나씩 추가되어 6개가 된 것인데, 여기에는 최부잣집이 존경받는 부자가 될 수 있었던 핵심이 들어 있다. '육훈'의 특징은 '가거십훈'과 달리 구체적 행동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그 행동을 하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가거십훈'과 같은 큰 원칙을 만나게 된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에는 양반으로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 둘 중 하나라도 가지면 사람은 오만해지기 쉽다. 아무리 처신을 잘하더라도 적들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적들이 많아지면 세상이 조금만 변해도 금세 몰락할 수 있다. 그래서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는 것은 단순히 높은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적을 만들 수 있는 행동들을 하지 말라는 일종의 대유법이 된다.

요즘 대선 주자들을 보면 누구나 "안보를 튼튼히 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중요한 이야기이지만 그 말은 별로 와 닿지 않는다. 그런데 "군인들에게 삽질을 시키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은 '육훈'처럼 무엇을 할 것인지 명쾌하게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효율적인 군의 운용이라는 대원칙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더 나은 화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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