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독극물 전달자 X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은 '화학무기 고춧가루'를 한반도에 들여왔다고 한다. 고춧가루를 뿌려 조선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고춧가루가 한반도의 식재료 문화를 완전히 바꿔놓을 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조선군도 화학전을 폈다. 바람을 이용해 석회가루를 적 진영으로 뿌렸는데 물기와 결합하면 높은 열을 발산하고 호흡기에 고통을 주는 특성을 이용한 전술이었다.

고대 중동에서는 유황을 화학무기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처럼 근대 이전의 화학무기는 그리 치명적이지 않았다. 맹독성 화학무기는 19세기 이후 등장했다. 화공학의 발전과 함께 각국은 맹독성 물질 개발에 열을 올렸고 무기화를 고민했다. 그러나 화학무기는 너무 치명적이어서 함부로 전쟁에 쓸 수 없었다. 같은 방법으로 보복당할 수 있어서다. 결국 살상 목적의 화학무기는 1899년 국제법에 의해 금지됐다.

말레이시아에서 살해된 김정남의 시신에서 악명 높은 신경성 독성물질 VX가 검출됐다고 한다. VX는 1952년 영국의 화학기업인 ICI 소속의 연구 인력이 살충제를 연구하다가 개발한 물질이다. VX가 무슨 단어의 약자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극물 전달자 X'란 뜻의 'Venomous agent X'를 뜻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미국 영화 '더 록'을 보면 테러리스트들이 VX가 장착된 미사일을 샌프란시스코에 발사하겠다고 미국 정부를 위협한다. 영화에서는 VX 한 스푼만으로 반경 8블록 내의 노출된 모든 생명체가 몰살당한다고 언급된다. 이는 영화적 과장으로, 실제 실험에서 나타난 VX의 반수 치사량(물질의 독성 테스트 시 실험군의 50%가 사망하는 용량)은 10㎎ 정도다.

VX는 너무 위험해 테러로 사용할 엄두를 내기 힘든 물질이다. 운반 과정에서 테러리스트를 위험에 빠트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김정남 살해에는 VX2라는 '바이너리 버전'이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바이너리는 두 물질을 혼합해야만 독성이 나타나는 독극물을 말하는데, 여성 두 명이 각각 하나씩을 지녔다가 김정남의 얼굴에 차례로 바르는 수법을 쓴 것으로 보인다.

김정남 살해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는 경악했다. VX처럼 악명 높은 독성 물질을 다중시설에서 대담하게 사용했다는 점 때문이다. 사건의 배후로 북한이 지목받고 있는데 정적 제거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잔혹함은 절로 치를 떨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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