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제조업 우선-대기업 중심-수출 드라이브'라는 기존의 성장 패러다임을 대체할 새로운 성장 공식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중앙중심 성장모델의 한계이기도 하다. 한편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방화(localization)가 융합된 세방화(世方化, Glocalization)가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활로를 각 지역의 개성과 특색을 십분 살린 라이프스타일 도시에서 찾고 있는 모종린 연세대 국제대학원장을 만났다.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린다. 스탠퍼드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대학에서 교수생활도 한 글로벌 이미지인데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지난해 골목길 산업에 대한 언론 기고를 많이 했다. '골목길이 창조경제다' '페이스북 창업자인 저커버그도 골목길을 사랑한다' '골목 문화가 우리 경제에 매우 중요하다' 등이었다. 그러다 보니 골목길 경제학자라는 별명이 생겼다.
-지난해 '라이프스타일 도시'라는 책을 썼다. 지역의 고유한 라이프스타일을 입힌 도시경제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이해하면 되나.
▶대표적인 사례로 제주도를 생각하면 된다. 2010년 이후 제주는 서울을 능가하는 매력적인 도시로 각광받고 있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본토 이주자, 외국인 투자자, 수도권 기업을 유치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제주의 자연주의 라이프스타일을 극대화한 도시 정체성이 경쟁력을 키웠다. 액티브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해서 제주는 아웃도어 활동이 왕성한 도시다. 젊은 사람들은 제주의 해변에서 서핑을 하면서 일을 하는 디지털 노마드(유목민) 라이프스타일을 꿈꾼다. 제주는 단순한 저녁이 있는 삶을 넘어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제공하고 있다.
-제주를 넘어 모든 지역의 활로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 탈(脫)산업화, 탈물질주의 시대에는 새로운 경제 활력이 필요하다. 바로 자유, 개성, 자아실현, 삶의 질, 다양성 등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저(低)성장이 만연한 시대에 지역 도시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매력을 살린 라이프스타일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라이프스타일 도시로의 전환은 숙명이다.
-탈물질주의가 물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가치, 전통과 어우러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예전에는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아기자기한 골목길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쇼핑하기를 원한다. 상품을 살 때도 가성비(가격대비 성능)뿐만 아니라 상품이 주는 탈물질적인 감성이나 스토리를 구매한다.
-'두뇌는 수도권 본사, 생산기지는 지역 산업도시'라는 이원구조를 극복할 진정한 지역중심 성장전략이 될 수 있나.
▶한국경제가 취해야 할 재균형(rebalancing) 전략의 핵심이 바로 중앙 중심 성장에서 지역 중심 성장으로의 대전환이다. 기업의 두뇌인 본사와 연구개발 부서가 수도권에 있는 한 지역 산업도시는 생산시설만 보유할 뿐, 스스로 혁신을 주도하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할 지식기반을 갖추지 못한다. 라이프스타일 도시라는 자생적 지역경제, 즉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야 '중심-주변' 구조에서 탈피할 수 있다.
-옷 고르는 시간도 아까워 매일 같은 옷을 입는 페이스북 창업자 저커버그가 출퇴근에 두 시간씩 쓰는 이유가 있다는데.
▶페이스북 본사가 있는 실리콘밸리는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 사이의 팔로알토를 중심으로 형성된 산업단지다. 좋은 주택지와 골프장이 즐비하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골목상권이나 도시문화는 빈약하다. 그래서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기를 원한다. 히피 지역 또는 보헤미안 지역의 술집과 맛집 그리고 쇼핑을 즐긴다. 많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통근 버스를 운영한다. 내가 스탠퍼드대를 다니던 30년 전에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다. 그때는 전원적인 실리콘밸리가 가장 이상적인 도시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많은 벤처기업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창업한다. 실리콘밸리의 중심이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로 본사를 옮기지 않으면 젊은 인재를 유치할 수 없을 정도다.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에 유교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가능하다고 제안했는데….
▶지금의 안동경제는 고택(古宅) 스테이 등 관광산업에 국한돼 있다. 선비정신이라는 엄청난 자산을 너무 좁게 활용하고 있다. 선비정신에 투철한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테면 한문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나 학원도 나올 수 있다. 또 선비정신에 투철한 경영자나 기업도 나와야 한다. 유교 자본주의가 필요한 시대인데 그 중심지는 안동이 돼야 한다. 한국적 경영의 정신적 원류를 제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유교 전통을 단순히 문화자원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산업화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는 수학여행 갔던 그리운 곳으로만 국민들에게 각인돼 있는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아니한가.
▶경주는 문화재를 지나치게 중시하고 있다. 이미 많은 문화재가 있는데 관광객이 줄다 보니 새로운 문화재가 필요하다며 황룡사나 월성을 복원하고 있다. 경주에 필요한 것은 매력적인 고분을 배경으로 한 힐링산업이다. 요가원, 명상원, 스파, 유기농 음식점, 독립서점 등 잔잔하고 평화로운, 경주와 어울리는 상권이 형성돼 도시에서 힐링을 즐길 수 있는 도시로 발전해야 한다.
-2015년 포스코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철강은 조선 등과 더불어 사양 산업으로 분류되는데 포항의 비전은 무엇이 되어야 하나.
▶철강 분야는 장기적으로 보면 구조조정이 필요하지만 아직은 포항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포항의 미래와 관련하여 피츠버그나 기타큐슈 등을 사례로 드는데 제 생각은 다르다. 두 도시는 철강산업을 포기하고 정보통신, 의류, 교육산업 도시로 탈바꿈했다. 저는 오히려 포항이 철강산업을 유지하면서 연관된 산업, 예를 들면 스틸아트, 스틸하우스, 스틸아키텍처를 비롯해 포스코에서 생산하는 첨단소재인 티타늄 등을 활용한 다양한 생활용품 개발 등 철강과 관련한 라이프스타일을 구축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가면 철공소 옆에 와인을 파이프 모양으로 진열한 가게를 찾아볼 수 있다. 문래동에 가면 모든 가게가 철공소를 테마로 인테리어를 연출한다. 그런데 보통 포항 하면 죽도시장을 연상한다. 포항도 철강을 테마로 한 상가를 구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면 젊은이들이 매력적이라고 느끼고 찾을 것이다. 지금의 포항은 포항다운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대구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했는데 이유는.
▶대구는 대도시 중 유일하게 단핵 도심 체제를 유지한 도시다. 신도시 개발로 인해 중심지가 분산된 다른 도시와 달리 대구에서 '시내'는 동성로 한곳을 의미한다. 이렇게 한곳에 집중된 상권은 대규모 유동인구를 창출할 뿐 아니라 전통시장, 명품거리, 공구거리, 카페거리, 근대문화 등 다양한 도시 문화의 체험과 융합을 가능하게 한다. 외부로 수출한 지역 브랜드의 대부분이 동성로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은 단일 도심의 소상공인 집적이 창조적 청년 문화를 형성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대구의 발전 과제는 명확해진다. 대중 교통망과 도보 접근성 확대로 도심과 부도심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도심 중심으로 친환경 생활을 추구하는 콤팩트 도시(Compact City)를 만들어야 한다. 대구가 콤팩트 도시를 구축한다면, 골목산업, 문화산업, 도시산업 등 도심을 기점으로 대구만의 색깔을 가진 다양한 지역 라이프스타일 기업이 늘어나면서 도시와 산업이 함께 발전할 수 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로 한류바람을 일으켰던 '치맥'도 대구가 발원지라는 사실을 교수님 책을 보고 알았다. 그렇다면 치맥도 발전시켜서 산업모델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대구는 1970년대부터 양계장과 도계장이 많아 닭고기 소비가 높은 지역이었다. 이러한 치킨 가공산업의 발달과 닭고기 소비문화는 1980년대 이후 교촌치킨, 멕시카나, 페리카나, 땅땅치킨 등 전국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외식산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적다 보니 도시 차원에서 집적화해서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산업으로 키울 생각은 못 하고 있다. 그저 흥미롭다, 재미있다 정도로 받아들이다. 생각을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치맥거리 조성, 국제 치맥 페스티벌 등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다.
-부산은 국제영화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등 주목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섬유도시 대구는 한때 '밀라노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동대문의 패션 브랜드가 성장한 것은 최근 3,4년이다. 최근 스타일난다, 형지 등 동대문 브랜드가 백화점에 들어갔다. 대구도 동성로의 야시골목을 비롯해 혁신적인 브랜드들이 나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로컬 소비다. 대구의 디자이너들이 성공하려면 대구 소비자들이 지역 브랜드에 관심을 가지고 제품을 사줘야 한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로컬 브랜드가 착한 소비다'라는 인식이 부족하다. 대구 소비자들이 같이 따라줘야 대구패션이 라이프스타일 산업이 된다.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Think global, Act local)는 말이 있다. 그런데 거꾸로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세계적으로 행동하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대구의 삼송빵집이 전국적으로 성공했다. 대기업 백화점들이 지역 빵집을 유치하려고 삼고초려를 한다. 대전의 성심당, 군산의 이성당, 안동의 맘모스, 전주 PNB풍년제과 등이 그렇다. 부산의 삼진어묵도 전국화에 성공했다. 이 브랜드들이 약진한 이유는 품질이 뛰어나고 개성이 강한 대표 상품, 예를 들어 이성당의 단팥빵, 성심당의 튀김소보로, 맘모스의 크림치즈빵 등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니스프리 같은 자연주의 화장품도 제주 브랜드이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니스프리가 최고의 브랜드가 됐다.
-제주의 성공은 제주특별자치도법 제정이 큰 기여를 했다. 타 지역의 라이프스타일 도시가 성공하려면 연방제 수준의 지방자치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가 5천만 인구인데 작은 나라가 아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싱가포르가 600만, 덴마크가 500만, 굉장히 큰 나라라고 생각하는 스웨덴도 900만밖에 안 된다. 이제 우리는 500만∼1천만 명 규모의 광역 경제권을 형성해서 그 지역이 독립적으로 새로운 산업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로 가야 한다. 부산경남권만 해도 인구가 800만 명 규모이면 스웨덴과 경쟁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케아, H&M, 볼보 같은 글로벌 기업을 키우는 것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중앙의 일이고 우리는 공장을 유치하면 된다는 수준에서 사고한다. 사고의 대전환이 절실하다.
-중앙정부의 라이프스타일 산업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
▶이제 겨우 지역 라이프스타일 육성사업을 시작했다. 오히려 지방정부가 큰 관심이 없다. 대부분 지방정부는 아직도 대규모 첨단기업 육성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물론 첨단기술 산업이 중요하지만 우리나라의 모든 도시가 첨단 산업도시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모든 도시가 라이프스타일 도시는 될 수 있다. 각자의 매력적인 문화와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에 돈을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면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 나가겠다는 정신이 중요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대구경북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시나.
▶문화 정체성과 개성 그리고 성취욕 등이 전통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일단 분위기만 잡히면 대구경북이 가장 앞서갈 수 있는 지역이 될 수 있다. 그 정도로 지역문화에 대한 전통과 자부심이 강하다. 지역문화에 기반한 새로운 산업이 많이 탄생할 것으로 기대한다.
※매일신문 TBC 공동기회 '신지호가 만난 사람'은 4일 오전 9시 30분 TBC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댓글 많은 뉴스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尹 대통령 탄핵재판 핵심축 무너져…탄핵 각하 주장 설득력 얻어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
이낙연 "'줄탄핵·줄기각' 이재명 책임…민주당 사과없이 뭉개는 것 문화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