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다시 기업가 정신이다

"오늘의 대구 경제는 이미 20, 30년 전 결정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도전을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했던 과거 지역 기업들의 모습이 현재 대구 경제의 쇠퇴와 맞물려 있는 것이죠."

얼마 전 자수성가한 어느 기업인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나온 얘기다. 그는 대구 기업인 상당수가 대물림을 통해 회사를 물려받았고 위기와 좌절을 모르는 2, 3세 기업인들이 미래에 대해 아무 준비를 하지 않은 결과물이 바로 오늘의 대구 경제라고 비판했다.

대구 경제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20년 전 김대중정부 시절로 시계추를 되돌려 보자. 당시 정부는 대구경북 섬유산업의 부흥을 기치로 이른바 '밀라노 프로젝트'(Milano Project)라는 대형 국책 사업을 추진했다. 제직과 염색 위주의 기존 섬유산업에서 탈피해 패션과 디자인, 어패럴 산업과 연계한 세계적 패션 섬유도시로 거듭나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밀라노 프로젝트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1단계로 1999년부터 2003년까지 6천890억원(국비 3천760억원, 지방비 515억원, 민자 2천615억원)의 돈을 쏟아부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국회 국정감사 때마다 대표적 예산 낭비 사업이라는 지적이 잇따랐고 감사원은 돈만 쓰고 성과는 내지 못한 대형 국책 프로젝트의 대표적 사례로 규정했다. 유관 단체장의 자금 유용과 부실기업의 수명 연장 논란까지 불거지며 지금까지 대구 경제의 후환으로 남아 있다.

밀라노 프로젝트가, 대구경북 섬유산업이 이처럼 헛돈만 날린 이유는 뭘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업가 정신의 부재다. 14년 전 초짜 경제부 기자 시절, 지역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밀라노 프로젝트의 실패 원인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당시 기업인들은 "대구 섬유의 긴급 처방전은 밀라노 프로젝트가 아니라 투철한 기업가 정신"이라고 입을 모았다.

대구 섬유는 R&D(연구개발)에 인색했다. 잘 나갔던 1980, 90년대 기업의 이익을 R&D에 투자한 CEO는 손에 꼽기도 어려울 정도다. 1세대 섬유 기업들인들이 2, 3세대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국가가 수천억원의 정책 자금을 지원했지만 정작 섬유산업의 위기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기업가 정신은 찾아볼 수 없었다. 쉽게 벌어 쉽게 공장을 정리한 일부 대구 섬유 기업인들은 주유소, 여관, 사우나, 임대업, 부동산 등으로 돈 불리는 데에만 급급했다.

밀라노 프로젝트 이후 20년. 지금 한국 경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직면해 있다. 지난해부터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는 국정 혼란과 미국 트럼프 정부의 등장, 사드 배치에 따른 한'중 관계 악화, 그 어느 것 하나 우리 경제에 호재는 없다. 이런 상황들은 지금도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이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딛고 우리 경제, 대구 경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원동력은 뭘까. 결국은 기업가 정신이다. 케인스와 함께 경제학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위대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미래를 예측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기업가의 임무요 정신"이라고 기업가 정신을 정의했다. 기업가들은 무모함과 창조를 통해 그들 이전에 존재했던 기업가들과 싸우고 승리해 '혁신'을 일궈내며 사회 변화의 동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21세기가 슘페터의 세기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애플,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우리 시대의 혁신적인 기업이 바로 이 같은 기업가 정신에 의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또다시 20, 30년 후 대구 경제의 미래 역시 기업가, 기업인들에게 달려 있다. 오늘을 사는 지역 기업인들이 다음 세대에 대물림해야 하는 것은 기업, 회사가 아니라 불확실성과 위험을 이겨내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자 하는 도전 정신, 바로 기업가 정신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