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문학노트] 강연호의 '월식'

그대 가린 건 내 그림자-강연호의

오랜 세월 헤매다녔지요//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강연호, '월식' 전문)

그대 가린 건 내 그림자,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 '헤매다니다, 보이지 않는 그대, 부르튼 생애, 그믐인 듯 저물다, 허구한 날 투정만 늘다, 내가 우는 울음, 내 그림자', 강연호의 언어 하나하나가 칼로 살을 도려내는 듯이 아파요. 언어가 살아 숨 쉬는 날카로운 칼이 될 수 있음을 이 시에서 읽어요. 예쁘면서도 따뜻하면서도 잔인한 언어. 도통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어쩌면 내 뒤에서 떠나지 않던 바람이, 구름이, 뇌성이, 눈비가, 황사가, 전깃줄이, 혹은 봄꽃이, 꽃비가, 빙판이, 됫새가, 서리가, 바로 당신이었다니요. 내 삶이 허허로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릴 때, 세상과의 싸움이 버거워 허덕거릴 때, 드러내는 만큼 상처 입어 꿰맬 시간조차 없이 던적스러울 때, 지치고 답답해서 죽음까지 생각할 때, 그대 뒤에서 울고 계셨다니요.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칼질을 하다가 살을 잘라버린 적이 있었어요. 떨어져 나가도 어쩌면 꿈틀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단번에 죽어서 굳어버렸어요. 피가 묻어나는 내 손은 살아 있는데 일부였던 살덩어리는 그대로 죽어 다시는 살아나지 못했어요. 여기저기 흠집 나서 흉터투성이인 내 손은 잘려나간 고통으로 여전히 소스라치게 아픈데, 버려진 것은 순식간에 아무 일 없는 듯이 사라져 버렸어요. 상처든, 고통이든, 슬픔이든, 심지어 기쁨이든 남은 자의 몫이라는 것. 문제는 나에게 아픔을 남기고 사라진 그것이 흉터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 그래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 그대 가린 건 내 그림자라는 걸 깨닫고 그 시간과 공간을 비워내더라도 결국 내 그림자는 그대의 가슴 한켠에 머문다는 것.

어제 우연히 올려다본 하늘에는 새들이 길을 만들고 있었어요. 구름이 아련하게 배경으로 걸려 있었지요.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분명 겨울이 가고 있어요. 어쩌면 참 일상적인 풍경일 수도 있지요.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가장자리를 메우고 있었어요. 이렇게 틈틈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건 무언가 가슴에 걸리는 그리움이 있다는 증거인 게지요. 지나간 추억의 응어리들이 슬그머니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지요. 그것들은 옹이처럼 내 영혼을 후비기도 하지요. 자꾸만 그대가 걸리고 삶이 걸리고 목이 걸리는 오후, 사무실 옆 중학교 운동장에는 젊은 영혼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어요. 뜰 앞의 목련은 봄꽃을 준비하고 있어요. 햇살은 따스하게 내리비추면서 그 일을 돕고 있어요. 나를 제외한 일상들은 엄숙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풍경은 엄숙해요. 잠시 흔들린 건 단지 나 혼자였을 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