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른 아침에] 보수 천민(賤民)의 시대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2회 백만원고료 한국문학 신인상. 전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전 자유경제원 원장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2회 백만원고료 한국문학 신인상. 전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전 자유경제원 원장

보수 아이콘이었던 박 대통령

이제 보수는 끝났다는 통탄

야당은 진보도 보수도 다 제 것

보수 마지막 선택의 시간 도래

대통령 탄핵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이 다가왔다. 광장은 둘로 나뉜 지 오래다. 촛불을 든 쪽은 탄핵 인용과 대통령 처벌을 외친다. 태극기를 든 쪽은 탄핵 기각(棄却)을 넘어 각하(却下)만이 정의라고 한다. 최순실 게이트는 고영태 일당의 사기극(詐欺劇)이라는 게 요지다. 설사 대통령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선출권력인 대통령을 파면할 정도로 위법하지 않다고 한다. 게다가 탄핵소추안부터 문제였다. 뇌물죄 같은 법원에서 증명되기는커녕 수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죄명이나, 세월호 사건 같은 대통령에게 법률적 책임을 물을 여지가 없는 일을 탄핵 사유로 나열했으니 그런 탄핵소추안 의결은 원천무효라는 것이다.

특검 수사도 의심의 대상이다. 특검은 야당만이 추천할 수 있었으니 그 특검에 정치적 중립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사실 특검은 처음부터 대통령을 뇌물죄로 옭아매려 수사력을 집중했다. 검찰 특별수사본부에서 뇌물죄가 아니라 강요죄로 보아 이미 재판까지 하고 있는 사안을 밀어붙인 것이다. 뇌물죄라면 대통령과 삼성그룹이 주고받는 거래를 한 것이고, 강요죄는 한쪽은 피해자일 뿐이니 이건 사건을 보는 시각이 정반대로 바뀐 경우다. 그 특검은 탄핵을 위해 만든 건 아니지만 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탄핵 사유가 곧 특검 수사사항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선(先)탄핵 후(後)수사'가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 나왔다. 선후가 바뀌어도 단단히 바뀌었다는 것인데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고개를 끄덕거리다가도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젓는다. 그 기저(基底)에는 대통령이 대통령답지 않았다는 분노와 낙담이 깔려 있다. '세월호 7시간'을 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데는 집무실에 출근하는 대신 관저에서 미용으로 시간을 보냈다는 의심이 도사린다. 그런 의심은 이제는 사실로 굳어져 어떤 해명으로도 풀 수 없게 되었다. 대통령에 대한 믿음이 송두리째 날아간 것이다. 최순실이니 차은택이니 하는 하찮은 자들이 대통령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통령의 권위는 산산이 조각났다. 어쩌면 지금 남아있는 건 일말(一抹)의 애정이 아니라 측은지심(惻隱之心)일 것이다.

그래서 보수(保守)는 통탄한다. '박근혜가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었다'라는 탄식이 그것이다. 이 나라 보수를 땅에 파묻어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만들었다고 원망한다. 헌재의 결정이 어떻게 나든 보수는 이제 끝났다는 자조(自嘲)와 분노가 뒤엉킨다. 신문과 방송에서 '샤이 보수'니 하는 조어(造語)가 떠돌아다니는 게 그렇다. 회사 동료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심지어는 가족에게도 '나는 보수'라는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는 '보수 천민(賤民)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누굴 탓하랴. 오직 박근혜 대통령만이 모든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그녀가 보수연(保守然)하면서 권력을 얻은 뒤 일을 이렇게 만들었다. 주변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권세를 누리던 자들이 일을 이렇게 키웠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박근혜정부를 보수정부라고 하고 새누리당을 보수정당이라고 우기던 것에 왜 우리는 아무런 의심을 보내지 않았을까?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전히 박근혜는 보수의 아이콘이며, 자유한국당은 보수정당이다. 바른정당도 그 결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래서 이제 야당이 큰소리칠 일만 남았다. 다음엔 어째도 야당이 집권할 것이라고 한다. 문재인과 안희정의 당내 경선이 본선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한다. 노무현의 적통이라는 안희정 충남지사가 보수 목소리를 내자 온건 보수표가 몰리는 이유다. 문재인에 반대하고 박근혜를 찍었던 이들이 이제 안희정에게 간 것이다.

그런 야당은 배가 부르다. 야당은 이제 진보도 제 것이고, 보수도 제 것이다. 야당 인사에게 이념을 물으면 '지금 보수 진보가 중요하냐?'고 힐난한다. 말하자면 보수는 폐족(廢族)이다. 그래서 감히 말하건대 이제 보수가 마지막 선택을 할 때가 왔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나는 보수이니, 새누리당을 찍을 수밖에 없고, 박근혜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이 나라 절반의 시민들이 마침내 갈림길을 만난 것이다. 한쪽은 그냥 죽는 길이요, 한쪽은 죽어서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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