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옛날 신문 속 여성] 기생-대부호 아들의 사랑…그 비극적 결말

'옛날 신문 속 여성' 코너를 시작합니다. 예전 신문에는 여성들이 어떻게 그려졌을까요? '옛날 신문 속 여성' 코너에서는 오래된 신문 속에 녹아 있는 여성의 시대적 모습을 되짚어보고 현재 변화한 여성상을 살펴봅니다.

1926년 3월 4일 동아일보에는 한 책 광고가 실렸다. 책은 '강명화 실기'. "천추에 원한을 품고 연애에 희생이 된 절대가인(絶代佳人). 그 다정다한(多情多恨)한 정경 비절참절(悲絶慘絶)한 하소연 엇잿던 한 번 보시오"라는 내용이다.

강명화, '비참한 연애의 주인공'으로 소개된 그녀는 누구일까. 강명화는 평양 출신으로 11세에 기생이 되었다. 비록 기생이지만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전에는 절개를 지키기로 맹세했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는 남성들은 점점 더 늘어났다. 그러다가 대구 남자 장병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장병천은 장길상의 아들로, 지금 동산의 남쪽 끝자락 엘디스리젠트호텔 일대 99칸 한옥에 살고 있었다. 장길상은 경북도농회 부회장을 지낸 사람으로, 대부호였다. 아들이 기생 첩을 두었다는 얘기를 듣고 장길상은 용돈을 끊고 아들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강명화는 패물을 팔아 장병천과 일본으로 탈출했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공부를 했지만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강명화는 장병천에게 옥양목 두 통과 흰 구두 한 켤레를 사달라고 했고 두 사람은 온양온천으로 향했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23세의 강명화는 쥐약을 먹고 자살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장병천도 같은 해 쥐약을 먹고 22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1927년 가수 우영식은 '강명화가'를 음반으로 발표하였고 '강명화 실기'(1924), '강명화전'(1925), '절세미인 강명화전'(1935), '강명화의 죽음'(1964) 같은 딱지본 소설이 나돌기도 했다.

집안의 이야기가 세간에 떠도는 것이 싫었던 장씨 집안에서는 책이 발간되자마자 모조리 사들여 없애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1967년 강대진 감독이 윤정희와 신성일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었고, 당시로는 엄청난 숫자인 10만 관객을 모았다고 한다.

이 광고는 1924년 발행된 소설 '강명화 실기'에 대한 광고이다. 일제강점기 속에서 사람들은 어두운 현실을 잊으려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 치명적인 러브스토리를 통해 혹독하고도 암울한 세상사를 잠시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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