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흙수저로 살아요

밤새 눈이 내렸다. 아직 겨울인가 했는데, 눈 속에 매화꽃이 피었다. 채 겨울이 가기도 전에 봄이 온 것이다. 아침에는 해가 떴다. 밤에 내린 눈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겨우내 버려둔 텃밭이 푸르다. 폭설 속에 내버려둔 배추며, 당근과 무가 냉해하나 입지 않고 보란 듯이 그대로다.

지난가을 초입에 씨를 뿌렸다. 혼자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느냐마는, 넉넉히 씨를 뿌리고, 겨울이 오기 전까지 부족함 없이 밥상에 올렸다. 가을걷이는 하지 않았다. 집 안에 들여놓을 공간도 없을뿐더러, 약을 치지 않아 뻐끔뻐끔 구멍 뚫린 걸 이웃들과 나눌 용기도 없었다. 젊은 새댁이 게을러 수확도 하지 않는다고 이웃들 입방아에 오르내릴까 민망했다. 겨울이 오면 얼 테고, 봄이 오면 녹아 자연스레 물러터질 테다. 적당한 시기에 흙과 섞어 거름으로 쓸까 했다.

겨우내 폭설이 잦았다. 1m가 넘도록 쏟아진 눈 속에 죄다 얼어 죽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성하게 살아있을 줄 생각도 못했다. 푸성귀가 귀한 계절에 아주 귀한 먹거리가 되었다.

휴일을 맞아 뒤늦은 수확을 하고 밭을 정리했다. 이른 아침, 목장갑을 끼고, 호미 한 자루를 들었다. 열 평 남짓한 텃밭 모서리에 쪼그려 앉았다. 가진 연장이라고는 호미 한 자루가 전부. 곡괭이, 삽이 있다면 훨씬 수월할 수도 있겠다. 비가 온 덕분에 호미질이 수월했다. 배추 뿌리며, 언제 뿌리내렸는지도 모를 풀도 가득하다. 쑤욱쑤욱 올라오는 풀뿌리에서 제법 푸르고 싱싱한 냄새가 났다. 밭 한 귀퉁이 양지바른 곳에는 명이나물이며, 부지깽이나물이 보드라운 순을 뽑아 올리며 기지개를 켜고 있다. 하도 예뻐 한 삽 푹 떠서 화분에 옮겨 심고 싶었다.

해가 중천에 걸려서야 일어섰다. 서너 시간 꼬박 쪼그려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렸다. 한쪽에 던져둔 잡풀들이 산을 이루었다. 손톱 아래 새까맣게 흙이 끼고, 옷도 엉망이 되었다.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땀으로 젖은 몸에서 흙이 까끌까끌했다. '올봄엔 또 뭘 심을까?' 알타리무, 열무, 파, 고추, 가지, 방울토마토…. 나는 이미 이 밭을 먹거리가 가득한 거대한 식품 마트로 상상하고 있다. 커다란 기쁨이 내 안에 터질 듯 밀려든다.

갑부 집 자식 누구는 부모로부터 억대의 자산을 물려받고, 외제차, 명품 가방과 액세서리, 고가의 식사와 어딜 가도 VIP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누구는 '부럽다'고 했고, 누구는 그와 자신을 비교하며 갑부 부모를 만나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 했던가. 더듬더듬 텃밭을 일구며 농사의 재미를 알게 해 주신 내 부모님께 감사한다. 금수저의 삶이 아니면 어떠랴. 조금 부족해도 흙에 기댄 하루, 이다지도 기쁨이 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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