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읍성의 슬픈 연대기

일제가 허문 보민의 거처 해방돼도 과거 청산 못 해

임진왜란에 부서져 영조 때 재건

110년 전 4월 친일파 손에 사라져

군사·행정 거점 사람·자원 모여

근대 도시로 발전하는 계기 돼

알수록 애잔했다. 끝이 비참했다. 원하지 않았지만 허물어졌다. 친일파가 앞잡이 노릇을 했다. 나라가 무너지는 모양과 빼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됐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해체됐다. 아픈 반복이었다. 안보와 보민(保民)의 거처였던 읍성. 침략받을 때마다 고난이 비켜가지 않았다. 비극에 슬프지만, 걸으며 축성의 의미를 곱씹는다. 다시 '희망'이란 말을 할 이유를 찾기 위해서.

◆대구읍성의 비극

111년 전이었다. 1906년 10월 어느 날, 하루아침에 대구읍성 일부가 훼손됐다. 대구부사였던 박중양(1872~1959년)이 앞장섰다. 그는 일본인과 함께 인력을 동원해 읍성을 철거했다. 정부가 불허했지만 밀어붙였다. 일본 거류민회의 요구를 따랐다. 당시 대구의 일본인들이 대구역 근처에 사들인 땅을 개발하기 원했다. 읍성이 걸림돌이었다.

박중양은 "읍성 일부가 붕괴돼 다니는 데 방해가 되니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내야 한다"고 정부에 거짓 보고를 했다. '이토 히로부미'라는 뒷배가 있어서 가능했다. 정부가 박중양을 징계하려 했지만 이토의 비호로 무사했다. 110년 전 4월, 꽃피는 봄에 대구읍성은 모두 사라졌다.

이후 박중양은 1919년 3·1만세운동 진압에도 참여했다. 운동에 앞장선 학생들이 누군가의 선동에 이끌렸다고 폄하했다.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훈장을 내렸다. 박중양은 86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1949년 북구 침산동 자택에서 체포됐지만, 반민특위 해산 후 병보석으로 출소했다. 친일을 하고도 천수를 누렸다. 읍성의 복원도, 친일의 청산도 이뤄지지 않았다.

◆자주국방의 초석

'대구부읍지'에 따르면 최초의 대구읍성은 1590년 선조 23년에 지어졌다. 2년 뒤 임진왜란 때 파괴돼 자세한 규모나 구조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토성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후 대구의 군사적 중요성이 높아졌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군이 대구에 주둔하거나 통과했던 것.

1601년 선조 34년에 경상도 최고 행정기관인 경상감영을 대구에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전엔 상주와 경주, 성주처럼 큰 읍에만 있던 기관이었다. 군사·행정의 중심도시로 대구가 성장하게 됐다. 자연스레 경상감영과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성곽의 필요성이 커졌다.

현재 위치의 대구읍성은 임진왜란 이후 144년이 지나서 지어졌다. 영조 12년인 1736년 4월에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6월에 완성했다. 감영을 설치하고도 135년이나 지난 뒤였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정축약조' 탓이다.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가 조선의 군비 확충을 막으려고 성을 더 못 짓도록 한 것이다. 대구읍성은 자주국방의 초석이었던 셈이다.

◆개혁과 보민사상의 실현

개혁사상도 담겼다. '청야전법'에서 '평지읍성'으로 안보개념이 진일보한 결과가 대구읍성이다.

청야전법은 산성을 방어 거점으로 삼는다. 적군이 침입해 마을을 파괴하는 데 무방비라는 약점이 있었다. 실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백성을 버려두고 지배층만 산성으로 피신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유형원 등 실학자들은 백성이 읍성에서 생활하고 전쟁 때 모두 나서서 방어하는 방법을 주장했다. 읍성을 평지에 세우고 크기를 확대하자는 평지읍성론이었다. 논란 끝에 평지읍성 중심의 방어가 설득을 얻었다. 읍성을 중심으로 인구와 자원이 모이고, 근대 도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조정은 1870년 대구읍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대원군 집권 초기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1866년 병인양요를 겪는 등 개방 압력이 높아지자, 전국의 주요 거점에 군사를 배치하고 성곽을 보수했다.

안보와 보민(保民)의 핵심이자 행정'경제의 중심이었던 대구읍성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결국 허물어졌다. 축성 170년이 되던 해였다. 그로부터 3년 뒤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됐다. 대구읍성의 붕괴는 나라가 무너지는 전조였다. 오늘날 대구읍성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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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맛있다. 입이 아니라 눈이 즐거운 맛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 좋다. '무엇을'보다 '어디서'가 중요할 때도 있다. 대구읍성 주변엔 분위기로 '먹어주는' 곳이 많다. 특이한 콘셉트의 빵에도 눈길이 간다. 물론 전통의 맛집은 기본이다.

◆물댄 동산

#아홉번 찌고 말린 '9증9포차' 인기

김안나(48) 대표가 지난해 8월 문을 열었다. 나무와 흙으로 만든 한옥이다. 1층은 카페이고, 2층은 천연비누'화장품을 만드는 체험 공간이다. 키 작은 꽃댕강나무가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나무 향이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벽면의 흙도 황토와 계피를 섞었고, 접착제를 쓰지 않고 나무를 끼워서 친환경적이다. 김 대표는 간호학을 전공했기에 평소 건강에 관심이 많았다.

아홉 번 찌고 말린다는 '9증9포차'가 인기다. 발효를 거친 건강주스도 권한다. 몸에 쌓인 나트륨을 배출한다고 김 대표는 자랑했다. 학생들을 상대로 체험학습에 공을 들였다. 여드름 등 피부에 관심이 많은 청소년들에게 유익하다. 2층에 비치된 CD와 LP를 골라 직접 음악을 틀 수 있다. 김 대표는 "동산동에 물을 댄다는 뜻의 상호를 통해 풍족하고 여유로운 공간이란 의미를 나타냈다"며 "앞으로 학생들에게 부족한 체험공간을 제공하고 싶다"고 했다. 대구 중구 국채보상로 492-17.

◆북성로 공구빵

#볼트·너트·몽키스패너와 빵의 결합

청년의 도전으로 탄생했다. 최현석(33) 씨는 지난해 '메이드 인 북성로' 공모에 선정됐다. 당시 아이디어가 공구빵이었다. 공구골목이라는 북성로의 정체성을 담았다. 목공예 예술가인 최 씨는 공구를 구하러 평소 북성로를 자주 들른 것이 인연이었다. 공모 당선으로, 북성로의 주물 공장과 함께 빵틀을 만들었다. 모양은 볼트와 너트, 몽키스패너 등 3종류다.

빵은 마들렌이다. 프랑스의 전통과자로 조개 모양의 작은 케이크이다. 카스텔라처럼 부드럽고 촉촉한 맛이 특징이다. 전통 방식으로 만든 맛과 대구를 대표하는 사과를 넣은 맛, 초콜릿을 입힌 맛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딸기와 녹차 등 다양한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 현재 북성로에 매장을 내기 위해 준비 중이다. 최 씨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빵과 차갑고 딱딱한 공구의 조합에 묘한 어울림이 있다"며 "시판할 수 있는 통로를 찾게 되면 지역의 특색 있는 관광상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053)242-1420.

◆순대·돼지국밥 라이벌

#서성로 '40여년 맞수' 돼지국밥집

서성로에는 대구를 대표하는 순대·돼지국밥 음식점이 있다. 바로 이모식당과 8번식당이다. 마주 보고 영업을 하는 두 집은 40여 년간 맞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맛과 서비스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인다. 손님 사이에 두 식당을 두고 파가 나뉠 정도로, 각자 장점이 분명하다. 두 식당 앞에 서면 선택장애가 생길 정도이다.

우선 맛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다만 취향에 따라 더 좋아하는 곳이 갈린다. 이모식당의 직접 만드는 막창순대에 좋은 점수를 주는 손님이 있다. 야채와 고기가 가득하고 고추가 매콤하게 씹힌다. 큼직한 순대가 풍성한 맛을 더한다. 쫄깃한 맛과 넉넉한 양에서 낫다는 평이 있다. 뼈갈비와 모듬 메뉴 등은 술안주로도 좋다.

8번식당은 깔끔한 맛과 친절한 서비스가 돋보인다. 가게 브랜드 디자인과 내부 인테리어가 현대적이다. 상차림이 정갈하고 손님 요구에 직원들의 손이 빠르다. 암퇘지로 만든 수육과 돼지족발·등뼈·사골을 24시간 끓인 국물은 비린내가 전혀 없고 정갈한 맛이 난다. 순대도 버섯과 채소 등 갖은 재료를 막창에 넣어 만든다. 이모식당 중구 서성로1가 81-2. 053)255-697. 8번식당 대구 중구 서성로1가 59-1. 053)255-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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