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무형문화재, 10만 시간의 지혜] (5) 문경 호산춘, 송일지 씨

1979년부터 시어머니 옆에서 자부심'의무로 만든 가양주

장수 황씨 종택에서 제사 준비로 한창인 송일지 씨. 호산춘은 송 씨에게 정성이고 자부심이다.
장수 황씨 종택에서 제사 준비로 한창인 송일지 씨. 호산춘은 송 씨에게 정성이고 자부심이다.

경상북도 지정 무형문화재 문경 호산춘(湖山春) 기능보유자 송일지(62) 씨를 만난 6일. 그는 방촌 할배(조선 초기 재상인 황희)의 생신(음력 2월 10일) 다례(茶禮)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장수 황씨 종택 사랑채 귀퉁이에 앉아 한참 동안 전을 뒤집던 송 씨가 마당으로 나온다.

"하필 오늘 오셨네. 1년 중 제일 바쁜 날에."

◆"호산춘은 뿌리(根)면서 자부심"

장수 황씨 종택이 있는 대하리에선 보물급 건물, 나무를 여럿 접하게 된다. 우선 종택이 경북도 문화재자료다. 종택 정원에는 수령 400년이 넘는 탱자나무가 있는데 이것도 경북도 보호수다. 종택과 좀 떨어진 사당이 있던 자리의 반송이 또 천연기념물이다.

최근 영화 '밀정'으로 세간에 알려진 '황옥'(영화에서 이정출 역을 맡은 송강호)이 이 집안사람이다. 그리고 집안 대대로 이어온 '호산춘', 이게 또 하나의 자랑거리다.

호산춘은 대량 생산되지 않는다. 쉽게 만들 수 없다. 그럴 만한 것이 막걸리 원액 알코올 도수 16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열흘이 걸린다. 반면 호산춘은 30일이면 16도, 100일이라야 18도의 술이 된다. 까다롭기 그지없는데 계절도 거든다. 발효 온도가 20℃ 이하여야 한다. 여름에는 술을 못 담근다는 거다. 추수 후 10월 말 술을 담그기 시작해 새해 첫날이 되기 며칠 전 술을 걸러 설날 차례에 제주로 올린다.

송 씨와 호산춘의 인연은 1979년부터다. 시어머니 고 권숙자(당시 49세) 씨가 빚을 때 허드렛일을 돕던 게 시작이다. 금융업계에서 일하며 돈 만지고 주판알을 튕기던 송 씨에게 호산춘은 그저 '가주'(家酒)였다.

그러나 대대로 만든다는 자부심은 해가 갈수록 커졌다. 뿌리를 지킨다는 의무감, 비장함마저 느꼈다고 한다. 송 씨에게 호산춘은 어찌 보면 조상에게 올리는 밥상이었다.

◆"네, 정성입니다."

실제 종가에는 매달 한 번꼴로 제사가 있다. 종갓집 맏며느리이기에 종가음식을 참 많이도 했다.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아니라면 지금쯤 음식연구가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최근까지도 유명 TV프로그램에서 섭외 요청이 쇄도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있다고 했다. 내로라하는 한식 대표들만 참가한다는 '한식대첩'에서도 연락이 왔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왜 안 나가냐"고 하자 TV에 장시간 얼굴을 비추기 부담스럽다는 게 이유였다. 사실 송 씨는 1997년 간암 판정을 받고 수차례 수술대에 올랐다. 지름 4㎝ 악성종양. 송 씨에게 자부심인 호산춘이 익어갈 때마다 종양은 조금씩 자라 있었다. 자부심과 바꾼 건강이었다. 정성을 다해 술을 빚다 보니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술을 빚다, 종부로 살다 생긴 병이려니. 그래도 20년째 잘 버텨냈다.

송 씨에게 "경쟁 상대가 있냐"고 물었다. 경북도 지정 무형문화재인 안동소주, 안동송화주, 김천과하주 등의 보유자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집안에서 만들어낸 가양주는 밑바탕에 '정성'이 있기에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다만 각종 품평회에서 보인 시음자의 반응에서 확실한 경쟁력이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40년 가까이 술을 빚으며 깨달은 지혜가 있다면 알려 달라고 했다.

"정성을 들여야죠. 정성을 들인다는 게 마음을 쏟는 거잖아요. 집중하게 되죠. 그게 바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 아니겠어요? 그에 따른 보람은 말로 다 못하죠. 물론 뜻대로 안 될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마음을 비워야 해요. 미련을 두면 안 돼요. 저 같은 경우에는 술이 좀 이상하다 싶을 때는 술을 다 버립니다. 다음 술이 잘 되길 바라면서 버려요. 아깝다는 생각의 미련도 당연히 같이 버려야지요."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