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비난의 순기능…『비난의 역설』

비난의 역설/ 스티븐 파인먼 지음/ 김승진 옮김/ 아날로그 펴냄

지난 1일 삼일절을 맞아 대구에 두 번째 소녀상이 설치됐다. 이날 안양'여수'진주 등 전국 6곳에도 소녀상이 설치됐다. 전국에 73개 소녀상이 세워졌고, 미국 애틀랜타와 샌프란시스코 등에도 소녀상 건립이 추진돼 외국에 있는 17개를 포함하면 올해 안에 소녀상은 100곳 이상에서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정부는 지난 1월 6일 부산 소녀상 설치에 반발해 주한 일본대사와 부산 총영사를 일시 귀국 조치했다. 아울러 양국 간 진행 중이던 한일통화스와프 협상을 중단하고 한일 고위급 경제협의도 연기했다. 소녀상 확대 설치는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비사과성 사과'와 반성 없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자 경고다. 사과 모양새를 취하되 정작 비난받는 부분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얼버무린 데 대한 대가다.

국어사전에서 '비난'은 '남의 잘못이나 흠 따위를 책잡아 나쁘게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문제의 한 단면에 치우친다는 점에서 '비평하여 판단하다'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따져 말하다'는 뜻의 '비판'과는 다르다.

뉴욕타임스 12개월치 기사 중 '비난'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1만1천 건가량의 기사가 나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포털 사이트에서 '비난'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한 달간 1만7천 건 이상의 관련 기사가 쏟아진다. 이쯤 되면 '비난 강박'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때로는 근거 없는 '지라시'와 비난 여론을 조장하는 '가짜 뉴스'가 문제가 될 때도 있지만, 비난이 꼭 나쁘기만 한 걸까.

미국 조직행동 분야 전문가인 스티븐 파인먼이 '비난'(blame)의 사회적 역할을 설명했다. 눈길을 끄는 이 책의 제목은 '비난의 역설'이다. 저자는 비난이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고, 순기능을 할 때도 있다고 강조한다. 합당한 비난과 분노가 부도덕한 정부와 비윤리적인 기업, 조직과 사회가 올바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을 전제로 비난의 사회적 역할을 설명한다.

책은 1부에서 비난 문제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파인먼은 비난이 다른 사람 또는 집단을 깎아내림으로써 우위에 서는 심리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 예로 중세 유럽을 강타한 마녀 사냥, 미혼모에 대한 낙인, 홀로코스트 시기 나치를 바라본 독일인에게서 발견된 방관자 효과, 이슬람'힌두교 등 각 종교'문화권에서 나타나는 명예 살인 등을 예로 들었다. 비난에 익숙한 사회는 잘못을 밝히는 데 집착한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보다 누가 일으켰는지 찾아내 책임을 돌리는 데 급급하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일상에 깊숙이 파고든 비난은 '희생양'을 만들었다. 잘못을 설명하고. 책임을 돌리려는 집단의 필요에 의해 '사회의 적'이 됐다는 것. 오늘날 동성애자, 소수 인종, 집시, 난민 등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비난은 힘없는 사람들이 권력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2부에서는 건강한 비난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야기한다. 도덕적 용기로 집단의 장벽을 넘은 내부고발자, 거리투쟁과 사회적 압력집단, 비정부기구(NGO), 부도덕하거나 이윤에 눈먼 기업에 조롱과 반전으로 대항하는 문화방해꾼 등을 소개한다. 이들의 목소리는 비난이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바로잡는 시작이 된다.

발전적 비난의 대상은 주로 기업과 정부다. 정부나 기업은 비난의 역할을 맡은 내부고발자, 비정부기구, 언론 등의 요구에 대해 설명책임(accountability'자신의 활동이나 의사결정에 대해 합당한 설명을 할 책임과 의무)이 있기 때문이다. 거대 기업은 '훌륭한' 명분을 내세운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행사를 후원하며 이미지를 쌓는다. 전위단체를 만들거나, 스파이를 침투시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도 비난을 면하려는 기업의 꼼수다.

정부는 그 책무가 더 크다. 많은 눈과 귀와 손이 정부를 향하고 있다. 세금으로 무엇을 하는지, '공공'을 위한다는 그들의 결정과 행위가 타당한지 설명하지 못할 때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저자는 '설명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지옥이 펼쳐진다'고 했다. 많은 지도자가 정치적 스캔들로 평판이 실추됐다. 두 번이나 탄핵 위기에 빠졌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탄핵 표결 전 스스로 물러난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사례를 통해 정치인의 설명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대 수준이 높은 이들의 거짓 사과는 더 큰 분노와 비난을 부른다. 정당한 사유로 비난받고, 이를 인정할 때 사과는 치유와 화해의 시작이자, 건설적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된다.

저자는 3부에서 '비사과성 사과'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을 제시한다. 저자는 비난 사회를 넘어, 공정사회'회복사회로 나아가려면 용서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진심 어린 반성은 비난이 일으킨 피해와 상처를 회복하는 출발점이라고.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1945년 8월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 2차 세계대전을 종식한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그의 책상 앞에 써 붙여 놓았던 글귀다.

진정한 사과에는 조건이 붙지 않는다. '나의 행동으로 상처를 입었다면' '실수였을지도 모르지만'으로 시작하는 사과는 용서받기 어려운 사과다. 또 진정한 사과는 깔끔하다. 외교 게임에서 '유감'이라는 표현이 '사과'나 '사죄'보다 자주 쓰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264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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