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봄의 시퀀스

봄은 걷기와 함께 왔다. 일요일, 둘레길 한 구간을 걸었다. 세상의 길은 어디에나 있다. 그 길은 대부분 못 가본 길이다. 전국에서 온 400여 명의 친구들과 트레킹연맹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갓바위 주차장을 출발했다. 느리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소식(小食), 작고, 단순함, 욕망을 비우며 빠른 속도를 제어하며 단순하게 살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퍼지고 있는 문화 현상이다. 이 문화의 진화는 되돌려지지 않는다.

팔공산은 대구의 진산이다. 거기에 귀중한 정신의 유산인 자연이 있다. 동서로 두 종합수도원이 산을 이웃하고 있으며 별처럼 많은 암자와 탑이 박혀 있으며, 한밤과 옻골의 깊은 생활 전통을 서원과 정자가 우리의 삶을 지켜 오고 있었다. 그곳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봄에는 살구꽃이 그림을, 그리고 비 오는 날에는 잊었던 얼굴이 생각나고 다정한 말이 들려온다. 바람 부는 날 자신이 걸어왔던 배경을 지우고 나 자신의 아름다운 배경을 만들기로 하였다. 우리들은 우리가 이웃들과 숙명적으로 떨어져 있지 않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세포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국시인 구퍼는 '신은 시골을 만들고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고 했다. 물론 시골에서 공동체를 이룬 시도는 유럽의 수도원과 동양의 사원 같은 종교적 공동체만이 성공하였다.

산은 아직 꽃이 피기 전이라 잎새들이 떨구어 생긴 나무 사이로 길이 드러나고 그 길은 나를 부른다. 젊음의 방랑 벽이 발동하였다. 길을 따라 걸었다. 갈래길에 서면 표식이 길을 가리켰다. 팔공산 둘레길은 대구 동구에서 칠곡-군위-영천-경산을 잇는 물경(勿驚) 108㎞가 될 것이다. 2014년부터 시작되었다. 아직 미완으로 개통되기 전 연구원 용역사업으로 첫 구간을 시행한 것이다.

슈베르트의 노래처럼 머물기 어려울 때는 나그네가 되라고 한다. 젊은이의 특권이 훌쩍 떠날 수 있다면 나이가 들면 그것마저 용이하지 않다. 지금 시절은 힘든 길을 가며 추위와 굶주림을 겪는 궁핍한 것이 없는 호시절이라 잘 짜인 하루 일정에 모든 것이 시간 단위로 진행된다. 여행자는 있어도 나그네는 없고 이별도 없으며 편지글도 사라졌다. 일상에서 벗어나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면 낯선 곳에서 만나는 모험과 원시의 풍경이 나를 압도한다. 걷기는 땅을 딛고 걸을 때 대지와 호흡하게 되고 새로운 기운이 솟아난다. 걷기는 고독을 견디며 시간을 이기는 것이다. 물질과 몸에 걸치지 않아야만 숲으로 갈 수가 있다. 인류의 거대한 시작은 첫걸음이었다. 첫사랑이 모든 사랑의 첫이었듯이 첫걸음은 나를 일깨우는 첫걸음임을 잊지 말자. 먼 미래를 생각하기엔 우리의 목숨은 유한하고 마음은 작은 것이다. 걷다 보면 생경(生硬)한 자연파괴 앞에서 발이 멈추고 가벼운 탄식과 도발에 한 시대의 공과가 그대로 다음 세대에게 문화적 유산으로 남겨진다. 삶은 연속되어져 우리 나름의 업적도 한편에 쌓여지는 것이다. 지난 꽃들은 다 어디 갔을까? 다가올 봄들에게 꽃을 양보하는 것이다. 나무의 향기는 생명의 냄새이며 행복의 미소이다. 나무는 나비와 새의 노래를 불러온다. 나무에는 생명과 초록의 공명이 흐르고 공기의 필터가 있다.

시가 언어로 짓는 집이라면 숲은 나무로 짓는 거대한 사원이다.'나무'하고 조용하게 이름을 읊조려 본다. 깊은 산 옹달샘에는 토끼가 산다. 새벽에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고 기도하고 해가 지면 어둠이 내릴 때 모든 사람은 쉬어야 한다. 너무 많은 것을 움켜쥐려는 것은 욕망의 삶이고 거짓의 삶이다. 오늘은 세상의 들끓는 온갖 말들에 귀를 막고 숲 속 바람 소리처럼 침묵하는 나무에 기도한다. 입안에 말이 적고 배 속에 밥이 적어야 기도가 된다. 가능한 한 자연 속으로 들어가라. 풀과 나무들도 그대에게 힘을 주리라. 숲 속에는 침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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