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每日 파워 인터뷰] 서기수 바르미 회장

칼국수를 얼마나 팔았기에, 대형 호텔 살 수 있을까?

실패를 성공의 디딤돌로 만든 인생역전의 주인공 서기수 바르미 회장은
실패를 성공의 디딤돌로 만든 인생역전의 주인공 서기수 바르미 회장은 "인생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에서 배우고, 성공의 길은 독서와 신문읽기를 통해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박노익 대기자

바르미 그룹(회장 서기수)이 대구를 대표하는 호텔인 호텔인터불고를 인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며 놀라워했다. 대구에서 출발해 성장했지만, 그만큼 바르미 그룹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칼국수 체인점' 정도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체 칼국수를 얼마나 팔았기에 대형 호텔을 살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증폭됐다.

자연스럽게 바르미 그룹의 설립자인 서기수 회장에 대한 호기심도 커졌다. 그러나 서 회장은 거의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언론에 알려진 것은 보도자료에 바탕을 두고 쓴 기사가 전부였다. 매일신문이 서기수 회장을 직접 만나, 4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그의 인생역전 과정과 철학, 향후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

◆'어제' '오늘' '내일'의 바르미는 다르다

바르미의 출발은 1998년 2월 서 회장이 친구가 운영하던 칼국수 집을 맡게 되면서 시작됐다. TBC대구방송 뒷골목 단독주택의 1층은 식당이었고 2층은 살림집이었다. 불과 몇 달 전 IMF 외환위기 속에서 부도를 맞아 부모와 다섯 형제를 포함해 전 가족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고 거리로 내쫓길 상황이었다. 잘나가던 중소기업 사장에서 빚쟁이 신용불량자가 된 서 회장은 참담하고 앞이 캄캄했지만, 어떻게든 재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1, 2시간 잘까 말까 했어요. 새벽에 일어나 법당에서 108배를 하고 난 뒤에도 거리는 여전히 캄캄했습니다. 빗자루로 골목길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내 정신, 내 마음을 청소한다는 생각으로 쓸고 또 쓸었습니다."

친구가 하던 버섯샤브칼국수에다 '소고기'를 추가해 '쓰리코스'(소고기버섯샤브+칼국수+볶음밥)를 개발했다. 문제는 홍보였다. 전단 인쇄비가 없어 펜으로 직접 초청장을 만들어 돌렸다. 초청장을 가지고 오면 쓰리코스를 주는 무료시식권이었다. 공짜로 주면 뭐가 남느냐고 걱정하는 고객들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먹어보면 반드시 다시 찾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예상은 적중했고 3개월쯤 지나자 손님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개업 첫해 범어네거리 직영점과 칠곡에 체인 1호점을 냈다. 대박이었다. 체인점이 200여 개까지 급속히 증가했다.

이때가 체인점 1기이다. 직장인 위주의 한 끼 식사를 제공한다는 콘셉트로 규모는 40평 정도, 주로 상가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체인점 2기엔 타깃이 가족외식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주차장이 필요했고 위치도 상가보다는 주택가를 선호했다. 규모도 80평 이상으로 커졌다. 현재는 체인점 3기에 해당한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입주로 전략이 바뀌었고. 규모도 120평 이상으로 대형화됐다.

"평균 3개월마다 신제품을 출시했고 5, 6년이 지나면 기존의 사업모델을 완전히 파괴하고 새로 시작했습니다. 고정관념을 부수지 않으면 새로운 걸 창조할 수 없습니다."

◆가성비(가격 대비 품질) 전국 최고!

사실 바르미는 대구보다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더 유명하다. 2011년 8월 서울 신도림 디규브시티백화점(현 현대백화점) 입점이 전환점이었다. 전국의 맛집 중에서 비수도권 유일의 입점업체였을 뿐만 아니라, 수도권 17개 입점업체와의 경쟁에서도 단연 매출 1위였다. 백화점에 왔다가 바르미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미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백화점을 방문하는 고객이 급증했다.

"맛, 가격, 인테리어가 성공하는 식당의 3대 요소입니다. 경상도식 얼큰한 맛이 수도권 시민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1만원 선의 부담 없는 가격에 미니뷔페(샐러드+즉석요리)를 곁들인 칼국수샤브 코스요리는 폭발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게다가 인테리어도 물, 돌, 나무를 이용해 어머니의 배속 같은 편안한 분위기를 전략적으로 연출했습니다."

이후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이제 바르미는 대형 유통업체가 '알아서 모셔가는 브랜드'로 성장했다.

대구 수성못을 감상하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산따마르게리따(양식)와 바르미스시뷔페도 브랜드 가치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데 한몫했다.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당시 세계육상경기연맹 회장 주최 갈라파티가 이곳에서 개최되면서 전 세계 내빈들의 극찬을 받았다. 바르미가 글로벌 브랜드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입증받은 셈이다.

◆좌절과 실패에서 배운다

서 회장은 경산시 용성면 육동 마을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과수농사를 지으며 초'중학교 때에는 별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하지만 5남매가 모두 대구로 유학을 나오면서 생활고를 겪기 시작했다. 사대부고(30회) 3학년 겨울방학 때에는 시골에서 쌓인 눈을 치우다 허리를 다쳐 졸업도 못한 채 이듬해 9월까지 누워서 지내야 했다.

"방에 누워 있는데 빚쟁이가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독촉하는 빚쟁이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이자만 먼저 주고 원금은 나중에 갚게 해달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애원이 가슴을 찢어지게 했습니다. 그토록 작아진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어서 일어나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동기들보다 한 해 늦은 1982년 영남대 전자공학과 야간부로 진학한 서 회장은 공부보다 돈 버는 일이 더 급했다. 학습지 배달, 아파트 건설현장 노동자, 중국집 배달원 등을 전전하다가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에는 복학을 하지 못하고 스스로 대학을 그만뒀다. 출판사 영업사원과 건강보조식품'잡화 판매를 하면서 '성실' 하나로 기반을 다졌고, 27세 때 10평 규모의 '건강타운' 사장(?)이 됐다.

"밤늦게까지 건강식품에 대해 공부를 하고 아침 조회시간에 직원 2명(아가씨, 할머니)을 상대로 매일 교육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연히 친구 소개로 입점한 보훈연금센터(민간업체)가 7곳으로 확장하면서 덩달아 기업 규모도 커졌다. 그리고 3년 뒤 보훈연금센터가 파산했을 때는 이 당시 배운 노하우를 활용해 대구 남구 대명동에 500평 규모의 '다다유통'을 설립, 점포 4개, 매출 200억원 규모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군대 시절부터 배우지 못한 '한'을 엄청난 독서와 신문 읽기로 보충해 왔던 서 회장은 1995년 월마트'까르푸 등 글로벌 대형마트의 한국 진출 소식을 알게 됐다.

"이제 우리 같은 중간 규모의 유통업체에게 미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팔공산 뒤편 영천 신령면에 1만 평의 농장을 구입해 수중재배 무공해 콩나물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당시 만두 파동이 있었던 때라 '고객에게 올바르고 정직한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상호를 바르미식품연구소로 지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품질에도 불구하고 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애로를 겪었지만, 계란(생산날짜와 시간을 계란 표면에 마킹한 당일란), 해수두부, 청정김 등으로 품목을 확대하고 '가정택배업'으로 판매전략을 바꾸면서 또다시 '대박'을 터트렸다.

"장사가 아주 잘 되어 문제가 생겼습니다. 재무'회계관리가 뒤따르지 못했습니다. 매출은 급증하고 있었지만, 대리점들이 어음결제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IMF 외환위기 당시 '흑자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금융권에 충분한 담보를 제공했는데도 외환위기로 담보가치가 급락하는 바람에 30억원 정도를 개인적으로 떠안아야 했습니다."

너무나 암담해 부산 태종대 자살바위를 찾기도 했던 이 시기, 서 회장은 '바르미샤브칼국수'라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됐다.

◆아시아 시장으로 진출한다!

10년 내 아시아 시장으로 진출한다는 목표를 설정한 바르미는 2014년 바르미투어를 설립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관광객을 모집해 국내여행을 하는 인바운드 여행사다.

"여행은 보는 것 50%, 먹는 것 50%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여행사는 가격할인은 하지 않지만 모신 고객들에게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여행 중 반드시 네 번은 바르미 식당을 이용하도록 합니다. 고품격 음식서비스에 고객들의 만족도는 최고입니다."

서 회장의 전략은 적중했다. 관광객 속에 포함된 동남아 사업가들로부터 '동업' 및 '체인점' 등에 대한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이 같은 동남아 사업가들과의 네트워크 구축은 향후 바르미의 아시아 시장 진출에 발판이 될 것이다.

원래는 비즈니스호텔 신축을 위해 부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호텔 서비스에 대한 관광객들의 불만이 많아, 아예 직접 호텔을 짓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호텔인터불고가 매물로 나왔고, 고심 끝에 인수를 결정하게 됐다. 끊임없는 변화와 과감한 파괴의 혁신을 거듭해온 바르미가 또다시 어떤 변신을 시도할지 주목되는 부분이다.

"성공한 때는 솔직히 왜 성공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실패에서는 분명하게 배울 것이 많습니다."

서 회장은 매달 모든 점포의 결산을 직접 한다. 회계는 기업의 얼굴이고, 회계를 잘 살펴보면 기업의 문제점을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을 '실패의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또 서 회장은 매주 경제서적과 잡지 1권 이상을 읽고, 20년 넘게 신문 3개를 정독하고 있다.

"매일 밤 10시~새벽 2시 사이에 책과 신문을 읽으면서 세상을 배웁니다. 폭넓은 시야를 가져야 응용할 수 있고, 여기에서 창조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젊어서 배우지 못한 걸 이렇게라도 만회해야죠."

서 회장은 가벼운 미소로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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