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2>-엄창석

계승도 그 까닭을 한번도 짚어 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어떤 동요가 가슴에서 출렁거렸다. 사흘 전 저녁이었다. 작업을 끝내고 목욕을 하고 있을 때였다. 목욕은 일주일에 한 번씩 할 수 있었다. 십여 평 남짓한 욕실에서 한꺼번에 수십 명이 뒤엉켜서 하는 목욕이지만 일인들은 이 기회를 기필코 놓치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마종수가 다가와 대구에 일거리가 생겼다면서 가지 않겠느냐고 소리쳤다. 일당을 배로 쳐준다는 말보다 대구로 간다는 것에 귀가 솔깃했다. "무슨 일인데?" "글쎄 잘은 모르지만 힘들지 않대." 일인 십장이 대구로 갈 사람을 모집하려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거였다.

이곳에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매립공사장에 수천 명의 일인들이 있는데다 여기는 엄청난 인력 공급원이었다. 부산 시가지를 넓히게 될 매립공사장에서만 아니라 예전에 경부선 부설 공사장에서도 그랬다. 일인들은 노역을 하다가도 뛰쳐나가 밀수꾼, 상인, 화폐 위조범, 포주가 되었고, 수비대 첩자로 변신했다. 기회를 탈 수 있는 틈서리가 생기면 물처럼 빠르게 스며들었다. 목욕탕을 나서자 날이 저물었고 일인들은 휘파람을 불며 아미산 아래 유곽으로 몰려갔다. 계승도 며칠 전부터 벼루고 있었으나 그만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마종수만 일인 패들 속에 섞였다. 읍성을 무너뜨리려 간다는 걸을 알게 된 것은 이튿날이었다. 대구성을 허문다고? 순간 아연했지만 그뿐이었다. 이미 대구로 가기로 마음을 먹은 터라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왜 부산 사람들이 가야하는 거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다시 기차에 오르고서였다. 기차는 검은 연기를 펑펑 뿜으며 기적을 울렸고 텅 빈 플랫폼에서 역원들이 깃발을 흔들거나 기차를 보며 거수경례를 했다. 계승은 마종수와 함께 화물칸에 올랐다. 기차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예닐곱 명의 한인들이 화물칸으로 건너왔다. "어이 여기도 넓네." "이 많은 편지를 누가 다 썼냐?" 그들은 일인들 사이에 있는 게 불편해서가 아니라 화물칸이 어떤지 궁금했다는 듯이 우편물 꾸러미를 자세히 뒤적이는 척하다가 바닥에 앉았다. 누군가 성냥에 불을 튕겼고 서로 머리를 맞대어 담뱃불을 얻었다. 대나무로 된 곰방대가 아니라 필터까지 있는 양식 담배였다. 한인들끼리 앉아 있는데도 이상스런 어색함이 감돌았다. 모두 묵묵히 담배를 빨거나 차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일본이 두명이 들어온 것은 청도가 멀지 않았을 때였다. 그 중 한 명이 다리를 약간 저는 듯한 우치타였다. 그는 번뜩이는 눈으로 한인들을 훑어보고는 이쪽이 알아듣든 말든 왜어를 지껄였다. 자기는 대창조(大倉組)에서 트럭을 몰고 있다면서 손을 말아 쥐고 운전하는 시늉을 하고는 우리에게 어디에 소속이 돼 있나고 물었다. 몇은 자기소개를 했고 몇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제 한 시간이면 도착하겠군."

그가 옆구리를 틀어 혁대에 달린 시계를 꺼내보이자 다들 시선이 쏠렸다. 왜어를 잘하는 마종수가 그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마종수와 내가 나누던 얘기였다.

"대구에는 인부가 없어요? 굳이 부산에서 올라갈게 뭐죠?"

우치타가 회중시계에 입김을 불어 손가락 끝으로 유리를 닦으면서 말했다.

"이거 시모노세키에서 산거요. 싸구려라 버릴라 했더니 시간은 잘 맞네. 1초도 안틀려. 아 그거? 음, 처음엔 관찰사가 대구 한인을 시켜 성을 헐도록 했지. 일꾼을 구하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어. 며칠을 기다려보자 했는데 어느날 관찰사의 집에앞에서 등에 칼이 꽂힌 채로 발견됐다는 거야."

마종수가 우리말로 옮기는 순간 다들 놀라 움찔거렸다. 바로 알아듣는 이와 옮긴 뒤에 알아듣는 이의 차이 때문에 놀라는 여운이 길게 이어지는 것 같았다.

"하핫, 겁먹을 거 없어. 우린 한밤중에 일부만 헐고 바로 내려올 거야. 복구를 못할 정도로만. 조선 조정이 케케묵은 성곽을 유지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돈이 없어 수리도 못하고 있는 판이야."

듣고 있던 한인들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몇몇은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한 투로 차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느 공사장이든 위험은 따라다녔다. 아침에 숙소를 나갔던 인부의 수가 저녁에 절반으로 줄어들어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별거 아니다. 자신이 그 속에 포함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타치가 화물칸으로 건너온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았다.

"가만, 난 형씨를 어디서 본 것 같소. 부산에 오기 전에 어디 있었소?"

우치타가 눈을 번뜩이며 계승을 쏘아보았다.

"나요?" "혹시 여기 청도 터널공사장에 있지 않았소?"

우치타가 손가락으로 기차 천장을 가리키며 계승을 쏘아보았다. 계승은 가슴에 쿵 소리가 나는데도 태연하게 바닥에 담배를 비벼 껐다.

"무슨 소리요. 초량에 오기 전에 낙동강 선단을 따라 다니며 장사를 했죠."

그 말도 틀리진 않았다. 계승은 마종수를 슬쩍 곁눈질을 했다. 마종수는 아무것도 몰랐다. 부산 매립공사장에 와서 만난 친구일 뿐이었다. 기차가 우왕하며 터널로 들어서고 있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차량 바깥으로 스치는 공기의 압력이 달랐다. 청도의 삼성역과 남성현역 사이에 건설된 성현터널은 경부선에서 가장 길고 난이도도 심했던, 험악한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악명 높은 터널이었다. 임계승은 그 공사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기차는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기울 때 대구에 도착했다. 대구에는 나지막한 바라크 역사가 붉은 황혼을 받고 있었다. 그가 대구를 떠날 때는 없었던 정거장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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