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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TBC 공동기획, 신지호가 만난 사람]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

"박 前 대통령에 간어한 사람 없어, 영남 선비정신 어디로…"

조용헌 교수는…원광대 불교학 박사, 조선일보  14년째 연재, , ,  등 저서 다수 사진=이무성 객원기자
조용헌 교수는…원광대 불교학 박사, 조선일보 14년째 연재, , , 등 저서 다수 사진=이무성 객원기자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대구경북의 당혹감과 상실감이 무척 크다. 어쩌다 이렇게 참담한 결과가 나왔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하다. 이럴 때일수록 근본에 충실해야 한다. 대구경북의 정신적 원류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동양학자 조용헌 박사(건국대 석좌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통령 탄핵 결정으로 현재 대구경북은 멘붕(멘탈 붕괴) 상태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긴 호흡으로 봐야 한다. 살다 보면 진눈깨비 내리는 날, 우박이 떨어지는 날도 있다. 어떻게 매일 화창할 수 있겠나. 모든 것에 흥망성쇠가 있다. 긴 호흡으로 보면 현 상황도 교훈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층 성숙하기 위한 성장통이 될 수 있다.

-대구는 대통령을 많이 배출해 대통령의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대구경북이 원래 권력 지향적 지역이었나.

▶아니다. 야당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핍박과 소외를 많이 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경상도 남인은 벼슬이나 권력으로부터 300년 이상 소외됐다. 회복한 계기는 1961년 5'16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권력정치의 두 변곡점을 1623년 인조반정과 1961년 5'16으로 본다. 조선시대 당상관 이상이면 정3품 이상이었는데 당시 당상관은 문경새재를 넘기 힘들다는 얘기가 있었다. 영남 남인은 벼슬을 하더라도 중급 간부 이하 미관말직을 주로 했다는 의미다. 영남이 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한 것은 1961년 박정희 등장 이후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조선왕조 후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떠올리며 그 당시부터 대구경북이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호적과 족보에는 그들의 본관을 안동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미 1500년대 초반 서울로 이사를 가 서울 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안동 김씨는 당색도 경상도 남인당이 아니라 당시 주류이자 집권 여당이었던 기호 노론당이었다. 가문의 주요 인물 가운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이 있었는데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송강 정철을 흠모했다. 당시 안동 김씨들은 경복궁의 서북쪽인 지금의 옥인동과 청운동인 장동에 살았다. 그래서 장동 김씨라고 불렀다.

-얼마 전 경상도 남인의 족보를 일컫는 '남보'(南譜)를 제목으로 칼럼을 썼던데….

▶조선시대 남인은 노론으로부터 많이 시달렸다. 노론 소속 시장이나 도지사가 경상도에 부임하면 영남의 유력 집안을 상대로 남인에서 탈퇴해 노론으로 전향할 것을 설득하고 회유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지금으로 치면 국세청, 검찰 등을 비롯한 권력기관을 동원해 압박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탈당을 하면 배신이었다. 그럼에도 노론의 압박이 심해지다 보니 노론의 압박에 견디고 내부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연판장 형태의 문서를 작성했던 것이 남인들만의 족보인 남보다. 남보에 기재된 사람들은 영남의 유력 집안 중에서도 A+급으로 평가받는다. 서인 노론의 압박에 절대 굴하지 않았던 집안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남보를 보유한 집안은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존경받는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지금도 영남에서는 탈당을 하기가 쉽지 않다. 탈당을 하면 비난을 받게 되는데 여타 지역과 달리 영남에서는 '탈당=배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노론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남인의 축적된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교는 조선시대의 국가 이념이었다. 그런데 유독 경상도에 유교정신이 강하게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인 노론의 경우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받아 지역에 발령을 받으면 부임지에서 현지처도 구하고 아이도 낳았다. 일부다처제다 보니 그럴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집안이 분산된다. 반면 영남 남인들은 과거에 급제해도 발령이 잘 안 나고 설령 발령이 나더라도 시시한 자리로만 배치되니 남인들은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집에서 글을 읽었다. 가장이 집에서 가정교육에 집중하였다. 벼슬이 변변치 않다 보니 글이라도 제대로 써서 양반으로서 인정을 받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아버지가 집에서 매일 책을 보는 집안이 남인 집안의 풍경이다. 반대로 서인 노론 집안은 아버지가 임지를 따라 이동하다 보니 집안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남인은 가정교육과 가풍 유지에 힘썼다. 이런 경향이 '집안'과 '문중'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동학운동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충청도와 전라도의 양반 계층이 괴멸된 반면, 경상도는 상대적으로 사회 고위층이 많이 죽지 않았다. 6'25전쟁 당시에도 낙동강 이남은 보존이 돼 양반 집안, 책, 가풍, 전통 등이 살아남았다.

-영남 남인의 절개는 의성 김씨 중시조인 청계 김진의 영수옥쇄 불의와전(寧須玉碎 不宜瓦全'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이라는 가르침에 잘 나타나 있는데….

▶선비는 죽더라도 옳은 말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집안이 요즘으로 말하면 언론인의 좌우명 같은 가훈을 보유하고 있다. 의성 김씨 집안은 안동 내앞(川前)에 많이 살았기 때문에 내앞 김씨라고 불리기도 한다. 집안 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말, 돌직구를 마다하지 않는다. 영남에 이런 가문이 몇 더 있다. 이문열 작가, 이재오 전 특임장관, 이희범 전 산업자원부 장관 등을 배출한 재령 이씨 집안이 그러하다. 재령 이씨들은 조선시대에 돌직구와 강속구를 던지다가 노론으로부터 엄청 두드려 맞았다. 또 한 집안이 영양의 주실 조씨다. 지조론을 쓴 청록파 조지훈 시인이 바로 주실 조씨다. 지조론은 집안에 내려오던 가훈을 현대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집안 가훈이 삼불차(三不借)인데 첫째가 돈을 빌리지 않는다는 재불차(財不借)다. 보증을 서달라고 하는 등의 행동은 양반 품격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둘째는 인불차(人不借)로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셋째는 문불차(文不借)로 글을 몰라서 누구에게 물어보는 창피를 당하지 말라는 당부다.

-영남 남인의 지조와 관련해 학봉 김성일은 1573년 선조와의 경연장에서 "전하께서 타고난 자품이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으시니 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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