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지난 몇 개월을 돌아보면서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발표가 있던 날 국회 점심 메뉴는 잔치국수였고 이정미 재판관의 헤어롤은 박물관행을 고려 중이란다. 염병 연속 3타까지. 의도하지 않았으므로 더 유쾌했던 우연이 이 와중에도 있었구나 싶다. 시대적 흐름을 주도한 성실한 사람들이 선사한 청량한 유머였다.

나는 한국과 네 시간 시차로 있지만 여기서 계속 살 것은 아닌데다 워낙 상황이 상황인지라 해야 할 일은 미루고 하던 일은 접은 채 시시각각 한국 소식을 접하고 있다. 저녁 뉴스를 생방송으로 보려면 여기는 자정이 되어야 한다. 생활 리듬이 불규칙해지는 것을 불사하고 혈안이 되어 뉴스에 집중한다.

뉴스 화면 옆으로는 누리꾼들이 쉴 새 없이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창이 따로 뜬다. 나 역시 몇 마디 쓰면서 내 속의 분노를 쇄도하는 문자의 홍수 속에 흘려보내기도 했다. 이 방법은 희열을 맛보게는 하지만 그 순간은 짧고 험악한 정글 같은지라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어쨌건 한참 동안 충격과 분노, 치욕, 때로 염려와 불안, 각성과 회한이 뒤죽박죽되어 잠을 설치기도 했다. 광장에서 함성을 더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안타깝고 아쉬울 것이다.

지난해 11월쯤 현지 신문에 한국 상황이 기사화되고 사진까지 게재된 것은 한국 사람으로서 몹시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 한 일본인 친구가 대규모의 비리와 질기고 대담한 인적 관계, 정책적 검열 시스템의 오작동에 대하여 놀랍다고 할 때는 뭐라고 말할 여지가 없었다.

한편, 시민들이 광장에서 보여주는 열기와 열정을 경이로워할 때는 괜히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갔다. 우리가 투표해서 선택한 자의 초라한 자질과 무능력, 권력에 휘둘리는 취약한 구조, 탐욕과 비열함으로 점철된 국정 농단 과정 등 낱낱이 밝혀야 하는 과정이 아직 남아 있지만, 민주주의라는 큰 틀에서 끝까지 평화시위로 의사표현을 선택했다는 점은 확실히 뿌듯해할 일이다.

문제는 탄핵 인용으로 상황 종결이 아니라는 점이다.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고 있다. 자격없는 자들의 탐욕이 노골화되고 그 옆에서 눈치 보는 부류가 하는 꼴은 민망하다. 비이성적 폭언과 비윤리적 위협이 섬뜩하다. 계엄하에 살아본 연배에서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수사학치고는 저급하고 퇴행적이다. 이런 행태를 무시한다 하더라도 검찰과 경찰, 정치인들은 제대로 자신들의 책무를 성실하게 해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겨울의 혼돈을 거치면서 주인의식을 확인하고 권리를 주장할 근육도 생긴 듯하다. 기분 좋은 우연과 유머가 그 와중에도 등장하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앞으로 몇 개월 더 늦은 시간까지 한국 소식에 목말라 할 것 같다. 아직 갈 길이 험하고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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