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 자란 시골 마을 야산에는 동굴이 있었다. 동굴 입구에는 온종일 햇볕이 어른 키만큼 조명이 돼 주었다. 마을의 개구쟁이 예닐곱은 이 동굴을 본부로 삼았다. 여름엔 메뚜기를 잡아 굽고, 겨울에는 고구마와 감자를 삶았다. 일흔을 바라보는 아버지도 이 동굴에서 고구마를 익혔고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랬다. 마을 동굴은 유년기의 상징이었고, 연대기였다.
동굴 틈새로 보이는 구름과 간혹 긴 구름 꼬리를 그리며 가는 비행기를 보는 것도 낙이었다. 봄볕 아지랑이를 타고 뒤틀려 보이는 들판도 신기했다.
얼마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인용과 그에 따른 불복 메시지를 보며 문득 잊고 있었던 동굴이 떠올랐다.
플라톤은 개인의 편협한 사고를 동굴에 비유했다. 베이컨은 이를 동굴의 우상으로 이론화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동굴에 갇힌 인간은 동굴 속에 켜진 촛불로 인해 벽에 비친 그림자를, 즉 실제 세계의 가상을 진리로 여긴다. 동굴 속에 갇힌 인간은 자신들이 본 그림자만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오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대통령도 유년 시절을 청와대란 동굴에서 지냈다. 인격이 형성되고 사회성이 길러질 시기에 서민들의 삶과 단절된 구름 위 생활을 했다. 청와대의 좁은 창으로 보이는 세상이 전부였고 몇몇 참모들의 말이 진실이었다. 그러다 1974년 어머니(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흉탄에 돌아가시고 5년 뒤 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김재규가 쏜 총에 서거하면서 '배신'이란 동굴을 파내려갔다. 상처는 동굴에 쇠창살까지 덧댔다. 2인자를 두지 않는 배신 트라우마는 불통을 불렀다.
최순실의 등장은 동굴에 비쳐진 그림자를 더 왜곡했다. 최순실을 모르쇠로 일관했던 김기춘 전 비서실장, 우병우 전 민정수석 등 참모들은 아예 대통령의 동굴 앞 보초를 자처했다. 인의 장막에 대통령을 모시고 철저히 가뒀다. 최순실이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았지만 누구도 그 알고 모름을 말하지 않았다. 오직 대통령의 동굴에 애국을 가장한 그림자만 비췄다. 그렇게 일개 강남 아줌마는 대통령과 대한민국을 짓밟았다.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으로 박 전 대통령은 자연인 박근혜로 돌아왔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여전히 청와대란 동굴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
사저로 돌아온 그는 헌재 결정에 '불복'으로 맞서며 정치적 명예 회복의 길로 들어섰다. 결론적으로 이 길은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하는 험로다. 지금은 친박과 태극기가 수놓은 꽃길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나라를 두 동강 내는 단절의 길임을 알아야 한다.
'모두 안고 가겠다'라는 당신의 말처럼 다소 억울한 면이 있더라도 모두 짊어지고 가시라. 나아가 태극기와 촛불을 하나로 묶는 화합의 전도사가 되길 주문한다.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미완의 대통령에게 국민들이 주는 마지막 소임이다. 그래야만 찢겨진 민심은 안도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수 있다. 대통령 문제는 법적 절차에 맡기고 더 이상 과거에 매달리지 말자는 여론이 고개를 들지도 모른다.
태극기와 촛불 역시 스스로 동굴을 허물어야 한다. 이들의 몸은 비록 광장에 있지만 마음속으론 여전히 뚫고 파고 훑고 후비고 깨고 쪼고 빻고, 이마저도 안 되면 폭파하면서까지 보수꼴통과 종북이란 편견의 동굴을 깊게 파내려가고 있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서로를 헐뜯고 있다. 태극기는 또다시 일전을 예고하며 전위대로 나섰고, 촛불도 이에 질세라 맞불을 놓을 태세다.
부디 촛불도 태극기도 진실한 광장으로 나오라. 김정은의 미사일 발사, 형 암살, 핵실험도 좌시할 수 없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 안의 동굴부터 메우고 일그러진 '우상'을 치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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