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면목이 생겼습니다.
1940년 9월 7일, 프랑스를 함락시키고 영국 남동부를 공습하던 독일군이 런던 폭격을 개시했다. 같은 해 7월에 시작된 '배틀 오브 브리튼'(Battle of Britain) 영국 본토 항공전이 영국 남동부 군사기지에서 런던을 위시한 공업 지대로 전장을 옮겨간 것이었다. 대도시 공업지역을 폭격 목표로 삼다 보니 민간인 희생자 수는 급격히 치솟았는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들 중 대다수가 가난한 도시 노동자들의 구역, 이스트엔드(East End)에서 나왔다는 점이었다. 독일 공군의 강력한 화력을 견뎌내기에는 노동자와 빈민 지역의 대피소와 주택들이 너무 허술했던 탓이었다. 훗날 맹위를 떨친 지하 방공호 체제는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고.
이에 반해 이른바 사회 지도층이 주로 거주하던 웨스트엔드(West End) 지역은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였다. 특히 사보이와 릿츠 같은 대형 고급 호텔들은 피신한 상류 인사들을 위해 한층 안락한 대피소를 운영하는 사업 수완을 발휘하기까지 했다. 런던에 피란 와 있던 유럽 각국의 왕실을 비롯해서 귀족들과 부유층이 여기에 가세, 웨스트엔드 지역은 가히 별세계가 되어 갔다.
그런데 폭격이 하루 이틀을 지나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폭격에 가족과 동료, 집과 직장을 잃은 노동계급에는 웨스트엔드의 이 광경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급기야 공산당이 주최한 집회를 통해 한 무리의 성난 군중이 사보이 호텔로 몰려가는 민란 직전의 위기로 치달았다. 모든 것이 갖춰진 지하 대피소에서 귀족들이 티타임을 즐기는 동안 집과 직장이 무너지고 불타는 광경을 목격한 군중의 분노는 굳이 설명해 무엇 하리오.
바로 이때 민심의 물줄기를 단번에 돌려놓는 상황이 벌어진다. 독일 공군의 폭탄이 국왕 조지 6세와 왕비 엘리자베스(현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가 거주하던 버킹엄 궁전에 떨어진 것이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왕비 엘리자베스의 소감은 이러했다. "우리가 폭격을 당해서 다행입니다. 이제 폭격에 희생당한 국민들 볼 면목이 생겼어요."
또한 총리 윈스턴 처칠은 국민들의 사기 저하를 우려해서 왕궁의 피격 소식을 감추자는 건의를 일축하고 오히려 이를 널리 알린다. 술렁이던 민심은 왕실도 서민들과 함께 고통을 분담한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노기를 지우고 단합하게 된다. 왕비가 전하는 소식은 상처받은 민심을 어루만지는 위로의 정점이었다. "국민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독일의 폭격 덕분에 그동안 왕실과 국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사라져 버렸답니다. 이제 여러분들 얼굴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2. 면목없는 지도자
반면 우리 사회는 재난 중에 민심을 어루만지고 하나로 모으는 지도력을 언제 목격했는지 기억이 감감하다. 갑자기 전쟁이 시작되어 피란도 가지 못한 국민들이 혼란한 틈에, 달랑 네 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대구까지 줄행랑을 치면서 '우리 군이 북한군을 격퇴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거짓 방송을 했던 자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가까이 2008년 세계적인 금융 위기 앞에서 권력자는 4대강 사업을 통해 사익을 극대화시켰고, 그 이전 IMF 구제 금융 사태 때 책임을 졌어야 할 경제 관료들은 이후로도 승승장구했으며 '무슨 무슨 노믹스'라는 허울 좋은 가면 아래서 특권과 특혜를 구가했다.
어디 그뿐이랴.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조류 인플루엔자로 온 국민이 발을 동동 구르며 상황을 수습할 지도력을 기다리던 때에 국가는 어떻게 작동했던가. 그렇게 리더십이 사라진 곳에서 재앙은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유린했다.
3. 지도자의 자격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새로운 리더십을 창출해야 할 시점을 맞고 있다. 갈라지고 상처받은 민심을 어루만질 리더십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아마도 고통을 분담하는 모범, 고통의 한가운데서 고통받는 이의 아우성을 외면하지 않는 모범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지도자의 도덕성을 묻지 않았던 세월의 참혹한 상처를 똑똑히 보았다. 타인의 희생과 고통을 발판으로 제 편익을 추구한 이들이 득세했던 시간은 국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천박한 승자 독식의 이데올로기를 퍼뜨렸다. 더 이상은 곤란하다. 낙오하는 이들의 어깨를 부축하고 굽은 등을 어루만지며 더불어 사는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이가 필요하다. 약자와 고통을 함께하는 것, 거기서 도덕적인 리더십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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