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회색 코뿔소가 온다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일대일 전투력에서 사자는 왕 대우를 받을 수 없다. 사자는 코뿔소'하마 같은 대형 초식동물에 가볍게 밀린다.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는 코뿔소와 하마는 육상동물계 전투력 2, 3위를 다툰다. 뭐니뭐니해도 최강자는 코끼리이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코뿔소를 제칠 수 있는 개체는 코끼리뿐이다. 실제로 아프리카에서는 짝을 못 구한 젊은 수코끼리가 호르몬을 주체하지 못해 코뿔소를 상대로 교미를 시도하다가 거절당하자 죽이는 경우가 간혹 있다.

코끼리나 인간 사냥꾼만 조심하면 코뿔소가 겁낼 대상은 없다. 코뿔소의 가죽은 포식동물의 송곳니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두텁고 질겨 고대에는 갑옷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거대한 뿔을 앞세워 시속 수십㎞로 돌진하는 코뿔소의 기세는 실로 엄청나다. 힘이 얼마나 센지 지프를 박살 낸 사례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름에 '소'자가 붙은 것과 달리 코뿔소는 생물학적으로 말(馬)에 가깝다. 동물 분류학상 코뿔소는 말이 속한 기제류(奇蹄類)에 해당된다. 정반대로, 하마(河馬)는 마(馬)자가 붙었지만 소가 속한 우제류(偶蹄類)이다. 구제역 전염병이 돌 때 동물원 코뿔소 사육동은 천하태평이지만 하마 사육동에 비상이 걸리는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코뿔소는 지독한 근시이다. 잘 안 보이기 때문에 달리면 그냥 앞으로만 간다. 저 유명한 불경 경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무소는 물소가 아니라 코뿔소를 가리킨다. 외뿔을 앞세워 우직하게 달리는 코뿔소처럼 혼자의 길을 올곧게 가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코뿔소가 달리면 땅이 요란하게 흔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서 누구나 미리 피할 수 있기에 아프리카에서 사람이 코뿔소에 의해 봉변을 당하는 사례는 드물다. 그래서 시사용어에 '회색 코뿔소'(Gray Rhino)라는 말이 있다. 미국의 세계정책연구소 미셸 부커 소장이 2013년 처음 제기한 개념이다. 코뿔소가 멀리서 육중한 몸을 흔들고 다가오는데도 알아채지 못하거나 무시하다가는 큰 위기를 당하는데 세계가 직면한 경제 상황이 회색 코뿔소에 해당된다는 경고다. 우리나라야말로 트럼프로 대변되는 보호무역주의와 북핵, 중국의 무역 보복, 가계 부채 문제 등 가공할 덩치의 회색 코뿔소가 돌진해오고 있다. 쿵쾅쿵쾅 엄청난 경고음이 발생하고 있지만 대책은 거의 보이지 않아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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