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태극기와 성조기

태극기, 그 숭고함의 표상이 사라지고 있다.

3'1절에도 태극기 게양을 꺼리는 이들이 생겨났다. 아이러니하게도 '태극기 부대' 탓이다.

탄핵 반대를 외치는 태극기 부대원들의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무엇에 대한 분노일까. 촛불? 최순실? 김기춘? 아니면 자괴감? 태극기의 분노는 전방위를 겨누고 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적으로 돌리고 있다.

분노의 대상이 광범위한 만큼 초점이 없다. 분명한 것은 분노의 대상이 점차 깊고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타격(?) 대상이 복수다. 촛불 민심에 대한 반감에서, 더불어민주당 대권 주자로, 유승민 국회의원으로, 바른정당으로 점차 확대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된 뒤에는 헌법재판소로, 자유한국당 내 탄핵 찬성파 의원으로, 인명진 한국당 비대위원장에게로까지…. 자칫 헌법 자체에 대한 분노로까지 번질 태세다. 헌법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제 태극기 부대는 그야말로 한 줌 모래알만 남았다.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과 박근혜서포터즈, 근혜사랑 등등. "촛불도 바람이 불면 꺼진다"며 촛불을 한껏 키운 김진태 의원도 속내는 태극기 부대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 같다. 나머지는 모두 이 부대에 눈도장을 찍어 '극우'의 한 표라도 구걸하려는 얄팍한 정치인뿐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듯하다.

그들이 내세운 '보수를 지킨다'는 명분은 구차하기 짝이 없다.

태극기 부대는 건강한 보수와 점점 거리를 두면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보수의 가치인 '지켜야 할 전통'은 지키지 않고, 부정부패와 범죄 피의자를 지키려고 한다. 합리적 보수와 건강한 보수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다. 진정한 보수가 아니라 '수구 꼴통'의 전형이다. 검찰 수사와 헌재 판결에서 드러난 사실조차 '조작', '왜곡'이라고 어깃장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성조기, 그 비굴함의 표상이 살아나고 있다.

태극기집회의 또 다른 특징은 늘 성조기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흔들고, 대형 성조기를 대형 태극기와 나란히 펼쳐 마치 한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특정의 적과 맞붙어 전의를 다지는 듯한 퍼포먼스를 펼친다.

조선시대 명(明)'청(淸)에 고개 숙이던 사대주의가 부활한 느낌이다. 성조기든 오성홍기든 태극기 옆에 다른 국기가 버젓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4대 열강(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하고, 자생력을 길러야 하는 게 우리의 냉엄한 현실이다. 어떤 국가도 우리를 지켜줄 수 없지만, 거꾸로 어떤 국가의 눈 밖에 나더라도 우리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4강의 틈바구니에서 지혜롭게 저울질하며 힘을 길러야 할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한쪽에 줄을 서는 어리석음을 태극기 부대가 앞장서고 있는 꼴이다.

태극기 부대는 왜 성조기를 앞세울까.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미국의 역할을 바라는 것으로도 비친다. 아니, 성조기가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탄핵당한 박 전 대통령보다 우방국 트럼프 대통령이 훨씬 더 믿음직스러운 모양이다.

최근 입지가 점점 좁아지면서 이 부대의 분노는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을 적으로 돌려세울 기세다. 자신들을 옹호하는 일부 극우 정치인들에게만 환호와 갈채를 보내고 있다. 태극기만한 성조기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모양새가 한심하고 안타깝게 여겨진다.

검찰 수사를 받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온 박 전 대통령이 전 국민적 비난의 목소리는 외면한 채 태극기 부대를 보고 위로를 받는 듯한 모습도 초라하고 안타깝게 여겨지기는 마찬가지다.

태극기가 극우(수구)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성조기가 한국의 수호기처럼 비치는 현실이 서글프다. 최태민에 이은 최순실의 망령이 몇십 년 후 되살아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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