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무형문화재, 10만 시간의 지혜] (6)봉화 유기장 보유자 고태주 씨

"高手가 되려는 것 자체가 욕심일 뿐"

봉화유기장 보유자 고태주(오른쪽) 씨와 그의 동생 호규 씨가 유기그릇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다.
봉화유기장 보유자 고태주(오른쪽) 씨와 그의 동생 호규 씨가 유기그릇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다.

찾는 이 드물던 유기그릇

웰빙 바람 불며 주문 쇄도

물량 맞추려다 불량 우려

소량이지만 최선의 노력

경상북도 지정 무형문화재인 봉화유기장 보유자 고태주(64) 씨는 지난 세월을 돌이키면 희한하기만 하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더니 유기장이가 딱 그 짝이다. 그가 유기 제작에 처음으로 뛰어든 건 30살(1982년) 때였다. 거동이 불편해진 선친(고 고해룡, 전 경북도지정 무형문화재 보유자)의 일을 도우려 허드렛일을 하던 게 시작이었다.

주석과 구리를 녹이는 게 그의 일이었다. 가장 단순한 일이었다. 유기를 다듬는 일은 엄두도 못 냈다. 3년간 했다. 다음으로 밥그릇 깎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10년 정도 하니 '어느 정도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다고 한다.

"그전에는 태백에서 광부로 있었지요. 제가 맏이고, 부친이 불편하시니까 일을 도왔지요. 그때만 해도 수입도 안 좋고, 별로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죠."

당시 주요 수요처는 사찰이었다. 불교용품으로 팔렸다. 지금처럼 수저나 그릇 등 생활 유기는 거의 없던 때였다.

연탄가스는 유기그릇을 검게 했다. 산업화시대에 접어들며 각 가정의 연료는 연탄이었다. 연탄으로 난방을 했고, 밥을 지어 먹었다. 유기장이의 맥이 끊어지는 듯했다.

"15년 전부터 인식이 많이 바뀌었어요. 유기가 살균 작용을 한다고 알려지면서부터지요."

세기가 바뀌면서였다. 웰빙 구호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유기의 입지가 달라졌다.

"그래도 소량밖에 생산하질 못해요. 홈쇼핑에서 같이 해보자고 접촉이 오는데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 물량을 못 맞추니까. 자칫 잘못하면 이름에 먹칠만 하는 거죠."

그의 경력, 올해가 36년째다. 하지만 그는 '고수'(高手)가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고수가 되려는 것 자체가 욕심이라 생각해요. 내가 하고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육상선수도 아니고 기록 경신이나 경쟁은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그에게 유기는 3대째 이어온 가업이다. 처음에는 고생길로 들어간다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승계하길 잘했다고 한다. 특히 제사나 혼수에 필요한 용품을 만들어줄 때 보람을 느낀다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기를 쓰는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전통도 물론 중요하지만 시대 변화에 맞게 같이 움직이는 게 오히려 전통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더 자극이 되죠.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듣고 반영하면 새로운 상품이 매년 10점씩 불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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