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가 본 것 동생도 그려 볼 수 있게…생동감 넘치는 말레이 여행기 『황금반도』

황금반도/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경북대 출판부 펴냄

'황금반도'는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19세기 영국 여행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의 말레이 반도 여행기다. 버드는 1878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2월 25일까지 홍콩, 광저우, 사이공, 싱가포르를 거쳐 말레이 반도 서안의 말레이 왕국 숭에이 우종, 슬랑오르, 페락을 탐사했다. 영국은 19세기 후반부터 말레이 반도 지배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는데, 버드는 식민지 개척을 위한 탐사대나 식민지 관리가 아니라 관찰자 입장에서 현장을 목격한 사실상 최초의 영국인이었다.

버드의 여행과 저술은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20, 30대 시절 미국과 호주 등에 체류하면서 여행작가로 잠재력을 확인한 초기, 1870년대 후반 일본과 말레이 반도를 탐사한 중기, 이후 58세의 나이에 한국과 중국을 탐사한 후기로 크게 나뉘며, 이 책은 중기를 대표한다.

47세에 말레이 반도 밀림으로 들어간 버드는 여행의 우여곡절과 감흥을 집에 홀로 있는 여동생 헨리 에타에게 편지로 보냈다. 이 책은 그 편지들을 나중에 엮은 것이다. 몸이 약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동생에게 버드는 여행지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생생하게 전하려 했고, 덕분에 이 책은 매우 사실적이며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버드는 '나는 여동생에게 편지를 쓰면서 두 가지에 집중했다. 첫째는 무엇보다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이었고, 그다음은 내가 본 것을 그도 머릿속에서 그려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현장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는 말이다. 버드가 나중에 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 다양한 정보를 담은 보고서 같은 느낌이 든다면, 이 책은 에피소드 중심의 이야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책은 본격적인 편지글을 공개하기에 앞서 당시 말레이 반도의 현황에 대해서도 짧지만 비교적 소상히 소개한다.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꽤 긴 분량이다.

'말레이 반도는 남북의 총 길이가 1천287㎞이며, 동서 폭은 좁은 곳이 96㎞, 넓은 곳은 241㎞에 이른다. 남북으로 북위 13도 5분∼북위 1도 41분에 걸쳐 있다. 북부의 인구는 말레이인들이 '산삼'이라고 부르는 타이인과 말레이인이 혼혈을 이룬다.'

'일반적 지질은 화강암 기반에 사암과 라테라이트, 점토질함철암으로 덮여 있다. 기후는 적도에 인접해 있어 덥고 습하지만, 희한하게도 원주민들에게는 물론이고 유럽인들에게도 쾌적한 편이다. 강우도 넉넉하고 일조량도 풍부해 최상품 열대 산물을 무수히 길러낸다. 저지대 습지에서 야영하는 유럽인이 걸리기 쉬운 말라리아를 제외하면 특별한 풍토병도 없다.'

가축이나 동물 분포에 대한 설명도 있다.

'선사시대 괴물처럼 보이는 큰 덩치에 가죽이 두꺼운 후피(厚皮) 동물이 전 지역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어슬렁거린다. 후피 동물에는 코끼리 외뿔코뿔소, 말레이맥, 멧돼지 등이 있는데, 말레이인은 후피 동물을 먹으려 하지 않지만, 숲에 사는 원시 부족들에게 후피 동물은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는 꼬리의 절반이 덫에 걸려 잘려나간 것처럼 보인다. 말레이인이 키우는 개는 유럽의 개와 사뭇 다르다. 다리가 껑충하게 길고 얼굴은 못생겼으며, 주인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길거리를 떠도는 아시아의 개와 비슷하다.'

'파충류는 너무나 많다. 비단뱀에서 코브라까지 40종의 뱀이 있으며, 강가에는 악어가 떼 지어 있다. 다양한 종의 이구아나와 도마뱀은 물론 웃는 개구리와 청개구리가 지천이다. 말거머리처럼 덩치 큰 해충도 있고, 전갈과 지네도 많다. 개미의 종류도 워낙 다양한데, 개중에는 몸길이가 5㎝나 되는 섬뜩한 모양의 검정 개미도 있고, 물리면 수술용 겸자(鉗子)에 잘못 집혔을 때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커다란 붉은 개미도 있다. 이곳의 해충 가운데 최악은 단연 모기다.'

말레이 사회상에 대해서도 짧지만, 구체적이고 알기 쉽게 언급하고 있다.

'말레이인의 종교와 법, 관습과 도덕은 통합되어 있다. 엄격한 무슬림이지만,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코란을 따르면서 전통과 미신도 믿는다. 말레이인이라면 누구나 메카 순례를 열망한다. 이들은 오랜 숭배 관행을 따르고, 라마단 금식을 지키며, 구슬 묵주를 차고 시간을 지켜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촌락의 종교적 안녕을 기도한다. 어린이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출생과 혼인의 종교적 의례 때 물소를 희생물로 바친다.'

'말레이인들에게 토착문학이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거의 모든 문학 작품들이 페르시아와 태국, 아라비아와 자바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레이인에게도 '히카야트 항투아'라는 말레이어로 쓰인 유명한 서사시가 있다. 말레이인은 저녁 기도가 끝난 뒤 마을에 모여 동네 이야기꾼들이 들려주는 항투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말레이인에게 산수를 위한 연산 체계가 없고, 고등수학에는 완전히 무지하다. 이들은 1,000 이상의 수를 세는 고유의 단위가 없어 인도에서 차용해 쓴다. 말레이인에게는 천문학이 없다. 아랍을 통해 전래된 천동설에 근거한 보잘것없는 우주관이 전부다.'

'말레이인은 지리, 건축, 회화, 조각은 물론 기계에도 무지하다. 게다가 이들은 더 이상 아랍어 문헌을 말레이어로 번역하지 않고, 말레이어 문학작품도 창작하지 않는다. 오래전에 번역되어 전래된 법과 도덕, 과학을 새롭게 연구하는 일도 거의 없다. 교육은 너무 퇴보했다.'

이처럼 개괄적인 말레이 소개가 끝난 뒤에는 본격 여행기(여행 중에 동생에게 보낸 편지)로 들어간다. 이 부분은 생동감이 넘친다.

'밀림의 모든 것이 너무나 경이롭다. 글로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문재(文才)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자연의 풍요와 상하(常夏'항상 계속되는 여름)의 더위 속에서 나는 지금이 1월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지금 영국에는 서리 내린 땅 위에서 나무와 풀들이 시든 채 삭풍을 맞고, 앙상한 가지와 엉성한 솔잎의 소나무들이 겨울밤 차가운 별빛 아래 흔들리고 있을 테다.' -193쪽-

'열대의 아침은 찬란하다. 밤새 웅크렸던 자연은 이슬을 흠뻑 뒤집어쓴 채 어느 순간 갑자기 깨어난다. 장밋빛 하늘은 근사하고, 새벽 공기는 시원하다. 이 달콤한 시간이 길게 이어졌으면 하는 게 모든 이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그 순간 태양이 떠오른다. -246쪽-

버드의 이 책은 가히 '열대 예찬'이라고 할 만하다. 열대의 동식물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슬은 밤새 열대의 자식을 어떻게 보듬는지, 사람들은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지은이는 이 모든 풍경을 세밀화처럼 펼쳐보여준다. 현대 과학을 기준으로 할 때, 버드의 여행기는 오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말레이시아에 대한 일반인의 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444쪽, 2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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