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올 줄 알면서도 차가운 바람에 마냥 추운 겨울일 것 같더니, 어느덧 봄이 오는지 봄꽃들이 많이 폈습니다. 닫혀 있던 꽃봉오리들은 어느새 꽃잎을 활짝 열고 피어납니다. 그렇게 꽃들은 자신을 활짝 열어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새로운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주일 복음을 읽다가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유명한 소설 '죄와 벌'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가난하지만 정의감 넘치는 법학도 라스콜니코프가 전당포 주인 노파와 전당포에 일을 보러온 노파의 동생을 살해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물건과 돈을 착취하는 노파가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이기에 없애버린 것이라며 자신이 저지른 살인행위를 정당화시킵니다. 자신의 행동이 옳았노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살인자로 취급하는 듯싶더니, 급기야 경찰의 추적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 상황보다 그를 더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 생각에 닫혀 있던 그는 마음 한구석에서 속삭이는 양심의 소리에 괴로워하기 시작합니다. 점점 불안과 자신 안에서 조금씩 싹트는 죄의식을 부정하는 자신의 철학에 대한 의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세계관은 결국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젊은 여인 소냐에게 감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비록 생활고 때문에 몸을 팔아야 하는 가련한 신세이지만 순수한 믿음과 영혼을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소냐의 발에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소냐에게서 낡은 '신약 성경'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성경의 예수님이 라자로를 다시 살리는 이야기를 읽어 달라고 청합니다. 소냐는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요한복음서의 대목(요한 11, 1-45)을 천천히 읽어 줍니다.
여러 면에 걸쳐 이 성경 이야기는 그대로 인용됩니다. 작가는 왜 성경의 예수님이 라자로를 다시 살리는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작가는 이 성경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말씀을 읽는 순결한 '매춘부'와 말씀을 듣는 비참한 '살인자'에게 이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소냐처럼 무겁디무거운 인생의 짐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무덤에 갇힌 것 같은 신세이든, 라스콜니코프처럼 자유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 규범을 무시할 수 있다는 아집과 그에 따른 양심의 가책과 분열로 결국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죽이고 무덤 속에 웅크리고 있는 신세이든, 어느 정도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 43) 하시는 예수님의 이 외침은 어쩌면 라스콜니코프의 모습으로 어쩌면 소냐의 모습으로 어둠 속 자신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의 온갖 악습과 부정한 욕심들, 독선과 불통, 또 내리누르듯 나를 옭아매고 있는 갖가지 짐과 굴레들, 이런 것들로 우리는 갇혀 있고 스스로 가두기도 하며 억눌려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자신의 어둠 속에 갇힌 모습, 영혼의 죽음이며 정신의 죽음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기준이 되어 공동선과 공동체의 규범은 무시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 가난한 이웃의 눈물을 외면한 채 제 뱃속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들로 가득 찬 사회, 이기심과 탐욕이 난무하며, 윤리와 도덕이 땅에 파묻히고, 인정과 사랑이 메말라 버린 사회, 또 인생의 짐에 짓눌린, 그 무거운 짐의 고통으로 갇힌 사람들이 많은 사회 또한 죽음의 사회일 것입니다.
라스콜니코프에게, 도스토옙스키에게 중요했던 예수님의 라자로를 다시 살리는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는 말씀에, 이러저러한 삶의 자리에 서 있는 우리도 잠시 머물러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스스로에게 해보면 합니다.
"OOO야, 이리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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