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친한 친구가 먼 길을 떠났다. 암 진단 후 불과 두어 달 만에 갑작스럽게 상태가 악화되었다.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 황망한 표정이었다. 병 문안을 미뤘던 친구들은 후회스럽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고인에 대해 아쉬운 점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병의 전조가 있었지만 그걸 무시한 게 화근이었다는 사실이다. 친구는 골프를 치면서 허리가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건강진단을 받아 보라는 주위의 충고를 일축했다. 운동 부족 때문이라는 진단을 스스로 내리고 오히려 스윙연습에 더 몰두했다. 자가 진단과 처방이 상태를 더 악화시킨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이은 후폭풍이 진행 중이다. 대통령 파면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불러온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박 전 대통령의 개인적 성정을 우선 지적할 수 있다. 성장 과정에서 몸에 밴 권위 의식 탓에 사람들과 격의 없는 소통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통령 앞에서 어떤 쓴소리도 불가능한 우리의 경직적 문화의 영향도 상당하다. 대통령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부족한 제도적 문제점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이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을 탄생시킨 가장 큰 요인인지는 철저하게 따져 볼 문제이다. 하지만 대뜸 헌법이 문제의 근원이며 개헌이야말로 그 처방이라는 성급한 결론부터 난무한다. 과연 그럴까. 동의하기 어려운 진단이요 처방이다. 개헌이 필요 없다거나 현재의 헌법이 지고지순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허리 아픈 게 운동 부족 탓이라고 지레짐작한 친구처럼 제대로 된 진단이 아니라는 말이다.
박 전 대통령은 헌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탄핵되었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국민의 신임을 배반하고 이른바 비선 실세에게 국정 운영을 맡겼다는 것이다. 공익을 위해 사용해야 할 대통령 권한을 사익 추구에 사용했다고도 한다. 한마디로 헌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헌법이 제왕적이라는 말은 현행 헌법대로 할 경우 일종의 왕처럼 된다는 말이 아닌가. 대통령이 헌법대로 하지 않아 탈이 났다면 헌법이 제왕적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성립이 되지 않는다. 박 전 대통령이 헌법대로 했다면 제왕적이 되었을 리가 없고, 탄핵도 없었을 것이다.
한 가지만 예를 들자. 헌법 제87조는 국무총리의 권한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제1항). "국무총리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제3항). 대통령이 장관을 임명하려면 국무총리의 제청이 있어야 하고, 국무총리는 장관 해임을 건의할 수 있다는 규정이다. 그런데 우리 헌정사에서 실질적으로 국무총리의 제청에 의해 장관이 임명된 경우가 있는가. 장관 임명이 있을 경우 대통령과의 이런저런 연관성을 분석하는 게 언론의 주된 임무이다. 총리와의 인연을 강조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대통령이 장관을 고른 후 총리는 형식적인 제청 절차만 밟아온 게 현실이다. 총리가 실질적인 장관 제청권을 행사하고 무능한 장관에 대해 해임 건의를 하는 등 '헌법대로' 했다면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최순실 아닌 어떤 비선 실세라도 대통령에게 장관을 추천하는 등 주제넘은 짓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경 해체는 세월호 사태 후 느닷없이 나온 대책이었다. 사건의 원인과 책임 소재를 면밀히 밝히려는 노력조차 없이 처방부터 성급하게 내놓은 것이다. 해경 해체의 후유증이 증폭되면서 정권이 바뀌면 해경은 부활이 거의 확실하다고 한다. 개인적 차원의 자가 처방은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국가적 돌팔이 처방의 부작용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라의 자원을 엄청나게 낭비할 뿐만 아니라 잘못되면 나라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다. 섣부른 처방전을 내놓기 전 우리나라의 문제가 무엇인지 진단부터 제대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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