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릉은 방에 앉은 예닐곱 명의 사내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상 위에 넘치는 가지가지 안주와 술잔들도 무연했다. 남자들 사이에 있는 세 명의 게이샤만 유난히 도드라졌다. 가지런히 무릎을 모으고, 붉고 푸른 기모노의 비단자락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품에 안고 있는, 얼굴을 희게 분칠한 게이샤들.
사내들은 회의를 마치기가 아쉬운 듯 금릉의 노래 인사가 끝나자 다시 논의에 불을 지폈다. 게이샤들의 웃음이 걷히고 지루할 정도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금릉은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알 수 없었다. 대부분이 이십대였고, 많아야 서른을 갓 넘긴 젊은 사람들이었다. 이토, 이와세, 오쿠라, 이카에,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 대구에 온 지가 2년 안팎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수만 명이 거주하는 이 도시가 황야로 보이는 듯, 마치 미지의 땅에 첫발을 내디딘 개척자처럼 야망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도시를 구획 짓는 방법에 몰두했다. 아마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유곽부터 지으려고 북쪽 성곽을 먼저 헐었어. 거기에 흙이 많거든."
갑자기 누군가가 한어(韓語)로 불쑥 말했다. 당연히 일본인인 줄 알았던 터라 금릉은 깜짝 놀랐다. 말한 사람은 얼굴이 반듯하고 눈썹이 가지런한 신사였다. 그제야 그가 대구의 수장인 박중양인 것을 알았다.
금릉은 당황했다. 방 안에서 한어를 쓰는 이는 그녀뿐이니까. 그녀를 위해서 해준 말이니까. 유곽이 서면, 자네들 일자리가 생겨. 그가 금릉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박중양은 이미 여악(女樂)을 폐지한 상태였다. 다른 도의 관찰사들은 관기를 거느리고 있었다. 각하, 감사합니다. 금릉은 가슴 옷깃에 손을 대고 머리를 숙였다. 박중양이 관기를 이끌고 연회를 연 것은 대구의 수장으로 부임했던 지난 1월, 한 차례뿐이었다. 금릉도 그 연회에 참석했었다.
금릉은 마당에서 ㄷ자로 둘러싼 방들을 둘러본다. 방들은 모두 불이 꺼져 있다. 조금 전에 밖으로 나왔던 앵무 아주머니의 방도 어둠에 섞여 있다. 오른편 끝 방만 완자 문살에 불이 비치고 있었다. 금릉을 발소리를 죽이고 뜰 한가운데 있는 화단으로 다가간다. 키 작은 석류나무 가지가, 앞으로 내민 그녀의 손을 가볍게 찌른다. 국화 향기가 은은하게 코를 자극한다. 화단 가운데에 작은 연못이 있다. 바위와 화강석으로 둑을 만든 작은 연못이다. 금릉은 낮에 연못에 단풍이 떨어져 있는 걸 보았다. 추수(秋水)가 너무 청명해서 단풍잎 그림자가 바닥에 고스란히 어려 있었다.
각하, 감사합니다. 금릉은 그날 야상옥에서 했던 말을 입속으로 되뇐다. 수치스러웠다. 유곽에 일자리가 난다는 걸 감사해 하다니. 지난 6월이었다. 관찰부 앞, 평소 천연두를 관리하는 종계소(種繼所)로 가서 성병 검사를 했다. 주사를 맞고 그곳에 육안검사까지 받았어. 일인들은 우리를 창기 취급했지. 우린 관에 속한 예기(藝妓)야. 시를 짓고 노래와 악기를 연주했잖아. 읍성이 없어지면 경부선 철도로 들어온 일인들이 삽시간에 도심을 차지할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금릉에게 읍성이 무너지는 것은, 성병 검사와 유곽이 생기는 것을 뜻했다. 예기의 생명이 끝나는 것도.
내년 4월까지 남은 성곽을 모두 헐게 될 걸세.
박중양은 금릉에게 가야금을 타라고 명령했다. 가야금을 품은 금릉은 반듯하고 차가운 그의 얼굴에서 지긋이 눈이 감기는 것을 보았다. 관찰사가 관기에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라고 여기는 걸까. 아니는 향수를 젖고 싶은 걸까. 가야금을 타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게 했다면 목젖이 열리지 않았을 거야. 금릉은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곡을 뜯었는지, 소리가 울리지 않고 자꾸 현 아래로 가라앉았다. 곡이 끝나고 일인들이 박수를 쳤지만 금릉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술상 건너에서 게이샤가 옆구리에 가벼운 율동을 넣으며 샤미센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목이 길고 소리통이 동그란 일본 악기였다. 방 안이 갑자기 밝아졌다. 빠르고 활달한 박자가 남자들이 든 투명한 유리잔 사이로 흘러 다녔다. 샤미센 소리가 얼마나 발랄한지. 갑자기 가야금이 궁색하게 느껴졌다. 이건 정말 구닥다리야. 소리도 청승스럽고. 따분하게 가슴이나 문지르잖아.
금릉은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지만, 일본 요릿집의 내부마저 아름답게 보였다. 원형의 창문, 작은 나무기둥들, 햇살이 비치는 방문 사이의 엔가와. 입술이 빨간 게이샤 옆에는 방 속의 방인 도코노마(장식방)가 있었다. 게이샤는 주걱처럼 생긴 도구로 샤미센 현을 빠르게 뜯고 있었다. 남자들이 화려한 연주자를 바라보았다. 술잔을 들고 내리는 모든 동작이 샤미센 경쾌한 소리에 오히려 압도되어, 남자들과 다른 게이샤들까지 침묵에 빠져들었다.
연주가 끝났다. 아까와 다르게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술자리는 무척 활기찼다. 사내들이 큰 목소리로 노래를 했고, 게이샤들을 희롱했다. 금릉에게도 청주가 몇 잔 돌아왔다. 박중양은 일본어로만 말했다. 그가 일인들과 섞여선지, 아니면 그녀가 술에 취해선지, 누가 박중양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럴 때 금릉 바로 옆에서 한어와 왜어가 섞인 취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너희들도 유우카쿠(유곽)가 필요할 거야."
박중양이 일본 기녀들에게 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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