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14>-엄창석

참 이상한 일이야.

계승은 바로 지난밤에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도, 이 번다한 상황을 비집고 그녀의 생각이 끓어올랐다. 장상만의 권유로 달성회 회원들과 어울리던 날, 애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여자가 애란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날, 수창사에서 달성회 회원들과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젊은 장사꾼들의 얘기를 듣고 있을 때였다. 골목에서 한 여자가 담장 위로 얼굴을 내밀어 수창사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저 여자가 애란이 아니지 하면서도, 열 한 살인 소녀가 지금 열여덟이 되었으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애란일 리가 없었다. 볕에 새카맣게 그은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여자의 흰 얼굴은 부유한 양반집의 규수에 가까웠는데 애란의 집은 지독히 가난했다. 계승은 슬그머니 청년들에게서 빠져나와 담장으로 다가갔다.

여자는 골목 안쪽으로 종종 걸음을 치고 있었다. 장옷을 무릎 아래까지 늘어뜨리고 우산은 든 채로 걸어가는 걸음걸이마저 열한 살 애란의 모습이 어려 있다고 여겼던가. 그렇다. 어딘가 그랬다. 7년 전, 그녀가 열한 살일 때, 멀리 그 아이의 모습이 겨우 손가락만큼 작게 보이는 곳에서 걸어올 때 애란인 걸 알아챈 적이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몸의 흔들림이나 아이를 둘러싼 어떤 대기(大氣)가 그녀임을 속삭여주는 것이다. 이윽고 여자는 골목으로 사라졌고, 계승은 진눈깨비가 내려 질벅거리는 흙 위에 찍힌 발자국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대감집 규수가 사뿐사뿐 걸어간 것처럼, 발자국은 유별히 가지런했고 손바닥으로 누른 듯이 가볍게 찍혀 있었다. 짚신이 아니고 가죽신을 신은 듯했다.

"흣, 그런 여자 못 봤어."

아까 담장 밖에 서 있던 여자가 누군지 아느냐고 계승이 묻자, 장상만이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는 투로 코웃음을 쳤다. 장상만은 지금이 기회라는 듯, 계승을 데리고 안채 대청마루로 갔다. 거기에 서석림이 있었다. 계승의 일자리를 부탁하기 위해 서석림에게 소개를 시키려는 것이다.

서석림은 갓을 쓰고 티 없이 흰 두루마리를 입은 고귀한 풍치를 띠고 있었다. 계승은 서석림을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사문진에서 상인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보부상으로 큰 상단(商團)을 거느리던 서석림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사문진 사람치고 서석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서석림은 당연히 계승을 알지 못했다.

"김광제 선생, 이 사람 광문사에서 일하면 어떨까요?"

곁에 있는 중년이 차가운 눈길을 계승에게 보냈다.

"자네 글은 아는가?"

"저……해성재에 다녔습니다. 언문은 읽고 쓸 줄 압니다."

"언문만으로 안 되지."

김광제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서석림이 나서 말했다.

"눈빛이 살아 있군. 일단 나와서 일을 배워봐. 한자를 모르면 안 되네. 부지런히 공부하게. 우리가 일손이 부족하잖습니까? 채자(採字)를 못하면 장작이라도 패게 하지요."

다음날부터 계승은 광문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잠자리가 마땅치 않았는데 인쇄실에 붙은 도장방을 얻을 수 있게 된 것도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대구로 돌아온 지 보름 만이었다.

마당에 서리가 걷힐 무렵에 직원들이 출근했다. 모두 여섯 명으로 두 명은 아직 스무 살이 되지 않았고 한 명은 서른 살이었다. 나머지는 계승과 비슷한 또래였다. 계승은 일을 배운 지 한 달쯤 되었지만 청소를 하거나 책을 포장하고 송달하는 잡일을 맡았다.

계승은 숯을 넣어 불을 지핀 화로를 인쇄실로 옮기면서 식자를 하는 권종성에게, 혹시 오던 길에 다른 일이 없었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지난밤 사건에 가담했던 것이 자꾸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뭐요?"

"글쎄, 일본 수비대나 헌병들이 평소와 다르게 움직인다든가……."

"광문사 주위를 수비대가 둘러싸고 있는데, 뭔 일이 생기면 먼저 알게 되잖소."

하긴 그랬다. 광문사의 앞과 뒤 관청은 모두 일본 수비대가 점거한 상태였다. 지난해 5월 광문사가 성안으로 이건할 때는 일인 관리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불과 몇 달 후 일본 이사청이 감사 집무실인 징청각(澄淸閣)에 들어서게 되면서 일본수비대가 따라 들어와 감영 정문(관풍루) 주변의 관청을 점거해 버렸다. 천연두를 주사를 놓는 종계소와 광문사만 빼면 일본수비대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계승은 이날 아침에도 일본 군인들의 호령 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여느 때와 같았다고 생각했다. 화로가 놓여지고, 전날 작업했던 문서들과 채자 상자와 교정쇄들이 착착 인쇄기 앞으로 배열되었다. 이즘에 소물리학(小物理學) 교과서를 간행하는 중이었다. 도내에는 41개군에 370여 학교가 있었다.

"책을 찍어내면 뭐해. 학교에서 사용하지 않는데. 요샌 학교도 점점 줄어들잖아. 광문사에 종이 살 돈도 없대. 우리들 급료는 나올라나 몰라."

서른 살 먹은 권종성이 교정쇄를 들여다보며 투덜댔다. 다른 직원들도 게으르게 채자 상자에서 활자를 고르고 조판작업을 했다. 그러다 시린 손을 화로 위에 탁탁 털며 시간을 보냈다. 계승이 처음 광문사에 오던 날, 직원들은 자부심에 찬 표정을 지으며 계승에게 기름 냄새가 밴 방으로 안내해서, 채자 상자 속의 활자들과 가압기에서 한 장씩 빠져나오던 인쇄물을 보여주었었다. 도시의 변화만큼 직원들의 자세도 빠르게 변했다.

서석림 댁의 심부름꾼 아이가 광문사로 달려온 것은 다들 화롯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오늘 문회가 열린 답니다. 오후 한시에요."

"그래? 몇 분이 오신대?"

"아참, 전체 문회는 아니고요, 시찰님과 회장님, 또 여러 어른들이 오시니까 화로를 여러 개 피워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승은 잠을 못 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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