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每日 파워 인터뷰] 누드사진 1세대 작가 이재길 교수

"예술-외설 편견의 벽 깨뜨리고 '얼굴 있는 누드' 개척"

국내 누드 및 패션광고사진 분야 선구자인 이재길 작가. 그는 세상의 편견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면서 여성의 아름다운 몸과 한국적 정서를 표현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국내 누드 및 패션광고사진 분야 선구자인 이재길 작가. 그는 세상의 편견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면서 여성의 아름다운 몸과 한국적 정서를 표현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1993년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출간된 누드사진집
1993년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출간된 누드사진집 '몽환'과 '몽환'에 실린 사진.
1988년 일본 요미우리신문 1면에 보도된 이재길 작가 관련 기사.
1988년 일본 요미우리신문 1면에 보도된 이재길 작가 관련 기사.
고3 때 개최한 첫 개인전에 출품된 사진. 1960년대 말 수성못이다.
고3 때 개최한 첫 개인전에 출품된 사진. 1960년대 말 수성못이다.

그의 사진 인생은 세상 편견과의 싸움이었다. 한국에서 누드사진 분야를 개척한 이재길(66) 작가. 한국에서 누드사진은 예술(藝術)과 외설(猥褻)의 경계선에서 고난을 겪어 왔다.

이 작가는 이런 척박한 여건에서 자기 길을 고집했다. 한 줌의 흙만 있으면 뿌리내리는 민들레처럼, 자신의 영토를 넓혔다.

지난 2월, 그는 18년간 제자들을 가르쳤던 계명대에서 정년퇴직했다. 인터뷰는 그의 제자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이뤄졌다.

-자타가 인정하는 국내 누드사진 작가 1세대다. 왜 누드사진에 몰두했나.

▶누드는 사진예술의 중요한 장르다. 해외 유명 사진작가의 대부분이 누드를 찍었다. 하지만 국내 예술사진은 다큐멘터리와 풍경에 치중돼 있다. 국내에선 누드에 대한 편견 때문에, 누드를 전문으로하는 작가와 평론가가 드물다.

서울 충무로에 스튜디오를 차려 패션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때 많은 모델들을 알게 됐다. 그 인연으로 누드사진을 시작했다. 사진을 통해 인체의 아름다움, 성(性)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소설가 최인호는 그의 누드사진집 '몽환'에 '그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정열적이면서도 조신하며 활달하면서도 수줍다'는 내용의 서문을 썼다.) 또 한국 여인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한복 입은 여성'도 앵글에 많이 담았다.

-'얼굴 있는 누드'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는 국내 누드사진에 모델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다. 바위나 나무 뒤에 얼굴을 숨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당당한 작품을 남기고 싶었다. 그것은 작가의 능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나의 카메라 앞에 서준 아름답고 자긍심 높은 모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에서 나체를 렌즈에 담는 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차별과 편견으로 작품 활동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다.

▶1985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기획했다. 하지만 전시장을 빌리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일본문화원과 연결됐다. 그곳에서 전시회 '빛과 여인들'을 열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사진집을 발간하려고 했다. 국내에선 이를 간행할 출판사를 구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에서 출판 제의가 왔다. 그래서 낸 작품집이 '몽환'이다. 국내에서는 이 작품집을 1993년에 출간했다. 이게 국내에서는 합법적인 첫 누드사진집이다.

돈을 벌기 위해 누드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내에서 누드사진은 돈이 되지 않는다. 왜냐고?. 누드사진을 사려는 사람들이 없다. 설령 사진을 구매해도 집이나 사무실에 걸어두지 않는다. '몽환'은 겨우 2천 부 팔렸다. 1991년 일본 배우 미야자와 리에가 모델이 된 누드사진집 '산타페'는 한국에서 5만 부나 판매됐다.

국내의 냉담한 반응과 달리 일본, 중국 등 외국의 사진계는 내 작품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1988년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1면에 나의 작품 세계를 보도했다. '한국의 신조류'라는 기획 시리즈였는데, 나를 사회적 편견에 저항하는 작가로 소개했다.

-누드사진 관련 송사(訟事)가 있었다고 하던데.

▶1988년 한국의 유명 잡지가 나의 사진 작품들을 '포르노성 기획'으로 비판하는 기사를 냈다. 몇 달 전 일본의 한 주간지가 나의 누드사진집 출간을 앞두고, 일부 사진을 소개한 것이 빌미가 됐다. 국내 잡지는 일본 주간지에 실렸던 나의 작품 사진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나는 졸지에 포르노 배우가 된 모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에서 발간한 책을 회수해 폐기했다. 또 잡지사를 상대로 저작권 위반 등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내 손을 들어줬다. 나의 사진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한 것이다. 국내에서 사진 저작권을 둘러싼 최초의 판결로 기억하고 있다.

-누드사진을 찍는 게 힘들지 않나.

▶벌거벗은 몸을 찍었다고 해서 누드사진이라고 할 수 없다. 작가의 예술 정신 및 주제 구상, 모델 선정의 노력, 작가와 모델의 소통 등이 녹아나야 진정한 예술 작품이 된다. 모델을 구하는 게 힘들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좋은 모델을 섭외할 수 없다. 지금까지 200여 명의 모델과 함께 작품을 만들었다. 모델은 작가의 예술관과 열정을 이해해야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할 수 있다. 촬영 후 전시회를 열거나 사진집을 낼 때는 모델들에게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한 점의 작품이라도 더 남기기 위해 설득하고 또 설득한다. 이 모든 일들이 인간적인 신뢰를 쌓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만약 모델과 스캔들이 있었다면, 작품 활동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3 시절, 대구에서 첫 전시회를 갖고 사진계에 입문했다고 들었다.

▶대건고 1학년 때 어른들이 다니는 월산사진학원에 다녔다. 신현국 씨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에게 배웠다. 1969년 9월 대구 공화당사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입시를 앞둔 고3 때다. 처음에는 내가 '국내 최초로 개인전을 연 고교생'이라고 생각하고 우쭐했다. 얼마 뒤 나보다 앞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훗날 '내셔널지오그래픽' 편집장을 지낸 김희중 씨였다. 나보다 열 살 많은 그는 연세대 2학년 때 미국 유학을 갔다. 이후 나는 김 씨를 '롤 모델'로 삼았다.

고교 졸업 후 진학 고민을 했다. 사진과가 아니라, 연극영화과를 선택했다. 원래 목표는 서라벌예대 사진학과(중앙대 사진학과 전신)였다. 하지만 서울예전 연극영화과가 성적 우수자에게 미국 유학 기회를 제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로를 바꿨다. 미국 유학에 대한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패션광고사진으로 성공했다는데 어느 정도였나.

▶건강이 좋지 않아 유학을 포기했다. 서울 명동에서 친구와 함께 스튜디오 '마우마우'를 차렸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하지만 일찌감치 광고사진에 눈을 떴다. 그래서 광고사진전을 기획했다.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국내 첫 광고사진전을 열게 된 것이다. 전시회 작품을 준비하면서 '대어'를 건졌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음악다방 지배인에게 모델 제의를 했다. 그는 키가 훤칠했고 잘생겼다. 지배인은 이 전시회를 계기로 유명 모델이 됐다. 그가 바로 모델계의 대부 이재연(모델라인엔터테인먼트 대표) 씨다.

1975년 건강이 나빠져 대구에 돌아왔다. 대구에서도 스튜디오를 운영했다. 결혼 후 다시 서울로 갔다. 광고사진 분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제일모직을 시작으로 코오롱, 삼성물산 등 국내 유명 패션 브랜드의 광고사진을 찍게 됐다. 많은 돈을 벌었다. 조수를 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지었다. 그들 가운데는 지금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작가들도 있다. 방송 출연도 잦았다.

1980년대 중반, 패션광고사진 분야에서 매출 1위를 차지했다. 돈벌이를 하면서도 예술사진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했다. 1970년대 말부터 패션사진과 함께 누드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43세에 미국 유학을 갔고, 그 후 교수가 됐다. 특별한 동기가 있나.

▶어릴 때부터 유학은 나의 로망이었다. 그리고 외국에서 사진 이론을 배우고 싶었다. 외국 학위가 있으면 나의 누드사진을 달리 평가할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후배의 소개로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아트에 진학했다.(3학년 편입) 영어는 'I am a boy'밖에 모르는 수준이니, 굳이 고생담을 얘기하지 않아도 짐작할 것이다. 학부를 졸업하고 프랫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도 받았다. 현지에서 작품 활동도 했다. 사진집 'American Myth'를 내고 전시회도 가졌다.

1997년 5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오니, 나를 보는 세상의 눈이 달라졌다. 예술의 전당에서 귀국 사진전도 열었다. 1999년 계명대 미술대 사진미디어전공 교수로 임용됐다.

교단에 선 게 엊그제 같은데 올해 2월 정년을 맞았다. 학생들에게 남이 다루지 않는 분야에 도전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재능 있는 제자들이 많았다. 교수들도 배출했다. 아마 훌륭한 작가가 많이 나올 것이다.

-앞으로 계획은.

▶뉴욕, 도쿄, 베이징 등 해외 초대전을 비롯해 30여 차례 누드사진전을 열었다. 아직도 국내에서는 누드사진에 대한 편견의 벽이 높다. 누드사진이 온전한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그날까지 나의 길을 가겠다. 사진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작품 활동을 할 생각이다. 갤러리를 만들려고 미리 봐둔 땅도 있다.

※이재길 작가의 파란만장 연대기

10대=고교 3학년 때, 대구에서 첫 개인전

20대=서울 명동에 스튜디오 '마우마우' 창업/ 결혼(27세)

30대=K1 스튜디오 설립/ 패션사진 업계에서 매출 1위

40대=미국 유학/ 대학교수 임용

50대=후학 양성 전념

60대=사진 50년 결산 전시회/ 정년퇴직/ 새로운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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