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명대사가 왜군 섬멸시켰던 호국사찰"

용연사 주지 능도 스님

용연사 주지 능도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동화사 말사인 운흥사 주지 등을 두루 맡으면서 부처님의 참된 기르침을 사부대중에게 전하고 있다.
용연사 주지 능도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동화사 말사인 운흥사 주지 등을 두루 맡으면서 부처님의 참된 기르침을 사부대중에게 전하고 있다.

"승병 최대 훈련장인 비슬산

냉천 지리적 이점 활용 격퇴

반송마을 용의 혈자리 명당"

-사명대사의 혼이 담긴 호국사찰이라고 불린다.

▶맞는 말이다. 1722년 임수간(任守幹)이 지은 '용연사중수비'(龍淵寺重修碑)의 비문과 1748년 금곡 선청(金谷 善淸)이 쓴 '용연사사적'(龍淵寺事蹟)에 따르면 용연사는 임진왜란 때 왜병들의 방화와 약탈로 잿더미가 됐고, 이를 본 사명대사가 인잠'탄옥'경천 스님 등에 명해 절을 재건토록 했다고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 당시 비슬산은 승병들의 최대 훈련장이었고 사명대사는 이곳 용연사에 기거하며 승군을 지휘했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청도를 점령한 왜군들이 팔조령을 통해서 대구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순찰사 이용순이 병사를 거느리고 팔조령으로 향했다.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들도 뒤를 따랐다. 왜군이 팔조령에 나타나자 겁에 질린 순찰사 이용순이 활과 창을 버리고 말등에 채찍을 가하면서 달아나고 말았다. 하지만 사명대사는 휘하의 승군을 냉천(가창면)의 절벽 위에 매복하는 등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왜군을 섬멸시켰다. 사명대사가 이끈 수십 명의 병사들이 수백 명의 왜군을 물리친 이른바 '냉천승첩'이 구전되고 있다.

-절 중의 절,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서의 의미는.

▶용연사는 적멸보궁이다. 현재 용연사 금강계단에 봉안된 부처님 사리는 자장법사가 통도사에 봉안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통도사의 사리탑이 파괴돼 사리를 도난당했다. 그 후 사명대사에 의해 다시 수습되고, 또 서산대사의 명에 따라 한 개의 함은 태백산 보현사에, 또 다른 함은 통도사에 안치토록 했다. 그러나 전란과 사명대사의 입적으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치악산 각림사에 일시 봉안됐다. 이후 현종 14년(1673) 5월 5일 이곳 용연사 금강계단 보궁에 모셔졌다. 금강계단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곳이다. 금강이란 금강보계(金剛寶戒)에서 유래된 말로 금강과 같이 보배로운 계(戒)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은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것을 깨뜨릴 수 없는 가장 단단한 것을 금강이라 하고 금강과 같이 반야(般若)의 지혜로써 모든 번뇌를 물리칠 것을 강조한다. 그러한 지혜는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으로 나누고 삼학 가운데는 계율을 으뜸으로 친다.

-천년고찰 용연사가 지닌 풍수학적 의미는 어떤가.

▶풍수지리학에서는 산을 '용'(龍)이라 부르고, 산의 정기가 흐르는 산줄기를 '용맥'(龍脈)이라 하며, 산의 정기가 모인 곳을 '용혈'(龍穴)이라고 한다. 특히 산의 모습은 천태만상이다.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엎드렸다가, 누웠다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하는 게 산이다. 만물 중 산이 변화무쌍한 용을 닮았다. 현재 비슬산의 수려한 산세도 그렇다. 백두대간으로 시작한 용맥이 남으로 치달아 태백산으로 이어진다. 또 동으로 내달린 낙동정맥은 팔조령을 거쳐 대구의 진산인 비슬기맥 즉 비슬산을 빚어냈다.

옛날부터 용연사의 형상이 풍수학상 용이 누운 모습과 흡사하다는 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지금의 용연사가 내려앉은 반송마을은 용의 혈(穴)자리로 하늘과 땅의 에너지가 한곳에 응축된 명당이라 전해진다.

-비슬산에는 용(龍)과 관련된 설화가 많다.

▶용연사의 용연지에 얽힌 설화가 유명하다. 비슬산 자락인 옥포면 반송리의 천년고찰인 용연사 바로 밑에 큰 못이 있었다. 어느 날 평온한 마을에 외적이 쳐들어왔다. 7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마을을 지키겠다며 나섰다. 결국 이 청년들 덕분에 마을을 외적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지만 싸움에 나선 청년들 모두가 이 못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외적이 물러난 그 못에는 7마리의 어린 용이 살기 시작했다. 죽은 청년들이 용으로 변신해 마을의 가뭄, 홍수, 화재 등 각종 재앙이 생길 때마다 해결해줬다. 세월이 흘러 용이 승천할 때가 됐다. 일곱 마리의 용들은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큰 싸움을 벌였다. 이 때문에 다시 마을에는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피폐해져 갔다.

주민들은 큰 바다로 나가 용왕님께 빌고 빌었다. 용왕은 그의 아들인 이무기를 못으로 내려보내 남은 용들을 모두 죽였다. 주민들은 가엾이 죽은 용들을 위해 절을 짓고 성심껏 제사를 모셨다. 다시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 이 절을 '용의 못'이라는 의미에서 '용연사'(龍淵寺)라 칭해졌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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