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5천원만 주세요." 둘째 딸 지은(가명'14) 양이 손을 내밀었다. 권채희(가명'37) 씨는 텅 빈 지갑만 만지작거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은이가 "피자 먹고 싶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려도 채희 씨는 다시 한숨만 쉬었다. 어깨가 축 처진 지은이는 반려묘만 쓰다듬으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요즘 중고생들은 친구와 어울리려면 돈이 있어야 해요. 맛있는 것도 사먹고 영화도 봐야 하니까…. 그런데 제가 용돈을 주지 못하니 지은이는 항상 집에 있어요." 채희 씨가 미안한 듯 말했다.
채희 씨는 홀로 다섯 남매를 키운다. 첫 번째 남편은 알코올 의존증에 가정폭력을 휘둘렀고, 이혼 후 만난 두 번째 남자는 배 속의 쌍둥이를 지우자고 닦달하다 떠났다. 그래도 채희 씨는 "아이들마저 없었다면 난 이미 세상을 등졌을 것"이라고 했다. "저만 바라보는 자식이 다섯이에요. 내가 세상에 내놨으니 성인이 될 때까지는 제가 책임져야 하잖아요. 제가 있어야 애들이 살 수 있고, 또 애들이 있기에 제가 살 수 있는 거죠."
◆아이들만 남기고 떠난 두 남자
채희 씨는 고등학교 때 공장에서 일하다 남편을 만났다. 남편의 재촉에 졸업하자마자 혼인신고를 했고 10여 년을 함께 살며 세 아이를 낳았다. 비극의 시작은 남편의 알코올 의존증이었다. 아이들은 하루하루 커갔지만 남편은 입에서 술을 떼지 못했다. 알코올 의존증을 치료해 보려고 정신병원에 수차례 입원시켰지만, 남편은 술을 끊은 척 속여 퇴원한 뒤 채희 씨를 위협했다. "어느 날, 흉기를 들고 '같이 죽자'고 위협하더라고요. 이러다가 죽겠다 싶어서 아이 셋을 데리고 남편 몰래 도망 나왔어요."
대구에 정착한 채희 씨는 이혼 후 직장에서 만난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 쌍둥이였다. "아이 다섯 모두 거두겠다"고 큰소리치던 남자는 임신 8개월에 접어든 쌍둥이를 포기하자고 했다. "8개월이면 배 속 아이도 어엿한 생명이에요. 아이를 포기하는 건 살인이잖아요. 그런 비겁한 남자와 사느니 혼자 잘 키우겠다고 결심했어요."
결심은 강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숨 돌릴 새 없이 어린 5남매를 키우던 채희 씨는 2년 전부터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듯했다. 환청이 들리거나 섬망에 휘둘리기도 했다. 여러 병원을 다녔지만 뚜렷한 병명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울증 등 정신적인 문제가 통증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채희 씨는 지난해 9월부터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지만 고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전셋집마저 철거 위기…갈 곳 없는 여섯 식구
통증이 심해지면서 직장생활도 유지할 수 없게 됐다. 의욕이 떨어지다 보니 집에는 빨랫감과 쓰레기가 쌓였다. 돈 걱정에 막내 쌍둥이는 유치원에도 보내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보다 못한 이웃이 아동보호센터에 '아동 방임 의심' 신고를 했고, 석 달간 쌍둥이와 분리돼 지냈다. 채희 씨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린다"고 고개를 떨궜다. "돈 없고 몸 아프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너무 미안했어요. 아이들이 돌아온 뒤부터는 깨끗한 환경에서 따뜻한 밥을 먹이려고 노력해요."
그러나 채희 씨가 다섯 남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예쁜 옷이나 맛있는 음식, 비싼 장난감, 유명한 학원은 채희 씨 가족과 거리가 멀다. 더 급한 문제는 집이다. 정부지원금으로 겨우 마련한 전셋집이 재개발로 철거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웃들이 모두 떠난 골목에는 채희 씨네 가족만 외롭게 남았다. 집을 옮길 형편도, 여윳돈도 전혀 없는 상황. 이웃집 벽에는 '철거 예정' 현수막이 걸렸고 골목에는 쓰레기만 쌓여 간다. 채희 씨 가족 곁에 남은 건 누군가 버리고 간 강아지 한 마리와 길고양이 새끼뿐이다. "제 형편에 이사는 꿈도 못 꿔요. 언제쯤 우리 식구가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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