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통영으로 가는 길은 봄날의 황사도 미세먼지도 잠시 옆으로 비켜선 듯 거리마다 빛이 환하고 눈부셨다. 우리 협회에서는 새봄 문학기행 장소로 '한국의 나폴리' 통영을 선택하고 회원들의 기대를 모아 산뜻하게 출발했다. 마침 통영에서는 불과 20일 전에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20세기 최고의 작곡가 윤이상을 기념하는 '통영 국제음악제'가 열렸다고 하니까 참으로 '예향의 도시'라는 말이 꼭 알맞게 어울리는 곳이다. 경남 통영시 항남동 항남 1번가 '김상옥 거리'의 들머리에는 선생님의 멋진 모습과 나란히 새겨진 시조 '봉선화'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비 오자 장독대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날 생각 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도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김상옥-'봉선화'

초정 김상옥(1920~2004) 선생은 1939년 '문장'지에 '봉선화'를 추천 받아 등단했다. 이 시는 두만강변으로 시집간 넷째 누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절제된 감정과 섬세하고 아름다운 가락으로 노래한 연시조다. 그뿐만 아니라 선생님은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뛰어났으며 서예, 전각, 도자기, 공예 등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길은 통영이 낳은 시조시인 김상옥 선생의 생가(항남동 64번지)가 있는 곳입니다. 이 거리를 특색 있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고자 항남 1번가와 초정거리를 함께 쓰기로 하였습니다. 이곳을 찾아오는 모든 분들께 애향의 향기가 묻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표지석이 세워지고 길바닥에는 시인의 시와 그림 등을 동판으로 만들어 깔아놓았다. 시인의 예술혼을 떠올리며 누군가는 오래 걷고 또 걸었을 거리, 어떤 이는 생각도 못하고 서둘러 떠나야 했던 거리, 그토록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 위로 오늘은 내 작은 발자국이 놓인다. 처음으로 들어선 이 좁은 길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군데군데 아름다운 시의 향기가 스며든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모퉁이를 돌다 발견한 또 하나의 동판에는 여기서부터 어느 방향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려주는 나침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통영 근대문학의 산실, '항남 1번가' 혹은 '초정거리'. 이 거리를 생각하며 길은 다시 새로운 길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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