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금릉은 술상에서 살며시 빠져나온다.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간다. 중국 광둥에서 난다는 원판형 단계연(端溪硯)인데 가장자리에 난초가 양각되어 있다. 오래전 석재 선생이 앵무 아주머니에게 선물한 벼루이다. 물빛이 점점 짙어지면서 벼루에서 묵향이 흘러나온다.
서(書)는 곧 몸이라네. 동파(東坡, 소동파)가 말하길 글씨는 신기골육혈(神氣骨肉血)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지. 이 다섯 가지의 묘리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니 서는 곧 사람을 이르는 것이네.
벼루도 그럴까. 벼루가 몸이라면 어느 부분에 해당될까. 금릉은 검고 단단한 먹을 움켜쥐고, 먹을 타고 전해지는 벼루의 질감을 느낀다. 먹은 남자이고 벼루는 여자겠지. 금릉은 얼굴이 붉어지는 듯하다. 여인의 가슴이나 둔부, 치골이 떠오른다. 짙은 먹을 농묵이라 하고 옅은 먹은 담묵, 마른 먹은 건묵이라 한다. 초묵(焦墨)과 습묵(濕墨)과 숙묵(宿墨)도 있다. 애무도 이러지 않을까. 짙게 할 수도 있고, 옅게 할 수도 있고, 마른 애무도 있겠지...... 금릉은 흠칫, 했다. 하마터면 벼루에서 먹물이 튈 뻔했다.
옆의 술상에서 석재가 호탕하게 웃는다. 오후에 몇 사람이 함께 있었으나 모두 가고 석재만 남아 잔을 더 기울이고 있었다. 석재가 홀로 남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데다 기루 주인인 앵무가 "한잔 더 하시고 가시지요." 하고 소매를 잡으면 못 이긴 척 주저앉고 만다. 합석을 마친 다른 방의 기녀들이 석재와 한 자리에 있기를 사모하니까 앵무 아주머니가 석재에게 술을 권하는 핑계로 기녀들의 소망을 풀어주는 셈이었다. 기루의 여자들은 눈이 부시도록 흰 옷을 입고 갸름한 얼굴에다 수염이 곧은 석재를, 전설의 기녀인 명월(明月,황진이)이 사랑한 화담(花潭, 서경덕)쯤으로 여긴다. 명기로 이름을 떨친 앵무가 명월이라면 석재는 화담인 것이다. 젊었을 때 앵무가 석재와 몇 달을 함께 보냈다고 하니까 화담이 아니라 벽계수 쪽에 어울릴지 모른다. 그러나 앳된 소녀들에겐 고아한 기품을 지닌 석재를 화담인 양하는 것이다.
소녀들은 석재가 취하기를 기다렸다가 벼루에 먹을 갈고 종이를 꺼내놓는다. 술잔을 기울이던 석재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오호! 흥을 술에 다 담지 못하면 그것이 서(書)가 되고 변하면 화(畵)가 된다네." 하며 펴놓은 종이로 몸을 옮긴다. 이미 소년 때부터 황제 폐하의 부친인 석파(石坡, 이하응)의 운현궁에 드나들 만큼 뛰어났던 글씨로 휘호를 하거나, 나라에서 최고 간다는 난초와 대나무를 그리는 진귀한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이 취한 석재는 붓에 먹을 듬뿍 묻혀서, 종이 위에다 손목을 휙휙 꺾으며 "이건 추사(秋史, 김정희)의 괴(怪)야. 괴하지 않으면 글씨가 아니란 걸 아느냐?" 하고는 내쳐 써내려간다. 또 어느 때는 당나라의 장욱(張旭)을 가져온다. "두보의 음주팔선(飮酒八仙)에 이백은 한 말 술에 백 편 시를 쓰고, 장욱은 석 잔 술에 초서(草書)의 성인이 된다 했네." 하며 광서(狂書)를 쓰는데, 사뭇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춘다.'(筆歌墨舞) 말이 저런 모습을 아닐까, 둘러 앉아 무릎을 꿇은 소녀들은 감동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이날은 먹을 갈았는데도 석재는 술상을 벗어날 기색이 없다. 석재의 등 뒤로 펴진 종이 위에 밝은 불빛만 어룽거린다. 방 안은 묵향과 술내가 자욱하다. 새로 장만한 상에는 어렵게 장만한 두루미 회와 안동주(安東酒)가 놓여 있다. 석재의 맞은편엔 앵무가 앉았고 석재 옆에는 설루가 분홍 옷소매를 받쳐 들고 잔을 친다. 먹을 다 간 뒤, 금릉은 앵무 옆으로 다가가 속삭인다.
"아주머니. 선생님께서 글을 쓰실 생각이 없으신가 봐요. 제가 그냥 가야금이라도 뜯을 까요?"
가야금도 석재에게 배운 것이다. 앵무는 시와 춤의 명가이지만 금릉의 가야금 솜씨는 그예 못 미쳤다. 석재 앞에 내놓기가 부끄러웠다.
앵무가 상 건너 석재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선생님. 아이들이 선생님의 중국 얘기를 듣고 싶어 해요. 상해의 운미 댁에서 만났던 중국 명서가들의 이야기 말이에요."
앵무는 교묘하게 말을 틀어 석재에게 붓 들기를 충동질한다. 석재는 몇 해 전에 5년 간 중국을 다니다가 운미(芸楣, 민영익)의 집에 머물며 중국 명서가들을 사귄 적이 있었다. 그때 석재 나이 38세였다. 이 시기는 석재에게 시화나 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때였다. 명성황후의 조카인 운미가 정가의 중심인물로 되풀이되는 정변에 따라 망명과 환국을 반복했는데, 마침 석재가 중국에 갔을 때 운미는 상해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서화에 뛰어난 운미는 천심죽재라는 이름을 붙인 저택에서 중국 서화가들을 초대하여 문묵을 교류했다. 당시 상해는 '해파'(海派)라 불리는 직업 서화가들의 중심지였다.
그러니까 앵무는 '해파' 서화가들과 운미란(芸楣蘭, 민영익의 난초 그림)을 직접 보았던 때의 이야기를 꺼내다 보면 석재가 붓을 들고 말 거라고 짐작한 것이다. 실제로 석재는 상해 시절에 받았던 운미란과 해파의 영향으로 그즈음 이름을 크게 떨치고 있었다. 석재가 별 말이 없자 앵무가 웃으며 다시 종용했다.
"운미란은 잎이 곧으며 끝이 뭉툭하다고 하셨지요. 포화(蒲華, '해파'의 서화가)의 대나무는 아래로 잎이 쳐지는 우죽(雨竹) 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만 두세요. 농산(앵무)은 오늘 술이나 하시오."
석재는 흰 얼굴을 들고 낮고 단호한 음성을 내뱉는다. 석재는 앵무보다 두 살 아래지만 기녀에게 예대하는 것은 그녀를 명기로 대접하기 때문이었다. 석재가 형형한 눈으로 앵무를 보며 잔을 권한다. 그때 금릉은 석재의 긴 눈썹에 눈물이 슬쩍 맺히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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