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촌탁(忖度)

요즘 공공기관과 공기업들이 좌불안석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 대통령의 대선 공약과 정책 방향에 바짝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다. 특히 한전 등 공기업들은 5년간 7조원 넘게 투자해 석탄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미세먼지를 50%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그저께 정부가 30년이 넘은 석탄발전소 8기를 내달부터 일시 가동 중단을 결정하자 나온 조치다.

대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KT'SK텔레콤은 최근 전국 13만여 개의 와이파이 접속장치(AP) 중 절반가량을 타사 가입자에게도 무료로 개방하겠다고 선언했다. 대통령 공약인 가계 통신비 인하에 적극 협조하겠다며 미리 운을 띄운 모양새다. 게다가 SK는 협력업체 직원 5천300명의 정규직 전환도 약속했다. 지난 2012년 이미 자사 AP를 개방한 LG유플러스가 선견지명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타 이통사들이 뒷북을 치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국민들은 왜 이제 와서 다들 하겠다고 부산을 떠는지 의아해한다.

얼마 전 일본에서 '손타쿠'(忖度)라는 단어가 유행어처럼 번졌다. 아베 총리와 부인 아키에가 평소 친분 있는 모리토모학원 재단에 국유지를 헐값에 팔도록 모종의 압력을 행사했다는 '아키에 스캔들' 과정에서 불거진 말이다. 일본 신문방송은 연일 이 단어에 주목했고 SNS를 통해서도 널리 퍼졌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아직 나오지 않은 명령에 앞질러 회유적으로 따르는 일'이라고 풀이하며 일본의 손타쿠 풍조를 조명했다.

중국어로 '춘둬오'로 읽는 촌탁은 원래 '시경'에 나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의도를 간파하다, 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의미다. '췌량'(揣量)과 같은 말이다. 재다, 헤아리다는 뜻의 촌(忖)과 도(度)를 붙여 쓰면 도는 '헤아릴 탁'으로 읽힌다. 힘 있는 사람의 안색을 살펴 일을 처리한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재무성 관료들이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실력자인 총리의 의중을 헤아려 일을 처리하자 일본 사회가 들끓었다. '알아서 기었다'고 본 것이다. 이 스캔들로 아베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다. 일본 언론은 손타쿠가 정계와 공직사회뿐 아니라 도처에 만연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문재인정부의 출범에 공기업, 사기업 할 것 없이 코드 맞추기에 여념이 없는 것을 두고 흐름을 따른다는 뜻에서 좋게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권력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는 한국사회의 촌탁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유형의 '적폐'라는 의심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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