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21>-엄창석

"너희들이 가엽네. 갈고 닦은 시와 노래, 검무와 악기가 소용없는 날이 오고 말았으니. 수백 년 동안 양반들의 수종을 드느라 얼마나 힘겨웠나. 그렇지만 선비들과 멋을 나눈다는 자긍심이 있었겠지. 가장 높은 수준의 가락과 수많은 사랑의 노래가 너희들이 없었으면 처음부터 생기지도 않았을 거야. 이제는 들어줄 이가 없고 애틋한 시를 지어 함께 희롱할 선비들도 사라졌네. 사막 같은 세상이 오고 있어. 시와 가야금이 아니라 몸을 팔아야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는 건지......."

석재가 낮고 우울한 음성으로 길게 말을 잇는다. 금릉은 석재의 처연한 모습을 처음 본다. 풍류를 즐겼던 석재여서 일류 기생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운지 모른다.

"자자, 한 잔씩 받게."

석재는 기녀들에게 안동주를 직접 따라준다.

"이런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세상은 조선이 홀로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어. 한때 조정에서 우리 것을 지키려고 나라의 모든 항구를 닫았지만 헛된 일이었지. 차라리 처음부터 열어놓는 게 나았을 지경이야. 모든 나라들이 우리를 겨냥하고 있었네. 우리를 노리고 있었지. 일본이 나서서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 급기야 대제국인 러시아하고도 싸웠네. 우리나라를 차지하려고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지. 이제 저들은 피를 흘린 대가를 여기서 찾으려 해."

"일본이 우리 황제를 폐하고 직접 다스릴 거라는 뜻입니까?"

우울한 목소리로 앵무가 말한다.

"지배의 뜻이 바뀌었지요. 청조 이전에는 땅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면 지금은 돈을 벌려고 전쟁을 치릅니다. 돈을 위해 칼을 쓰는 거지. 영국이 인도를 차지한 것이나 프랑스가 월남을 침공한 것도 돈을 벌기 위해서지요. 칼보다 돈이 무섭습니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선비와 농민들이 칼을 들고 일어서지만 일본은 군인들이 아니라 상인들을 내보내고 있거든. 상인들을 위해 길을 넓히고 상인을 보호하려고 경찰서를 세우지. 이제 상인들이 도시를 장악하고 있어요. 칼을 쓰지 않으니까 도시는 스스로 그들을 찬양해. 칼에는 맞서 저항을 하지만 돈에는 고개를 숙여. 도리어 개화 물결이 온 도시들을 휩쓸고 있어요. 호롱불보다 전깃불이 얼마나 밝은지 아는가? 꼴을 먹일 말을 타지 않고도 대구에서 의주까지 하루면 당도해. 일전에 이일우 공의 말씀이, 돈이 대구성을 파괴했다 하였는데, 틀리지 않은 소리야. 너희들도 어찌 몸을 지키겠는가."

알아들을 수 있는 석재의 말은 여기까지이다. 열이 치민다는 듯 배자 단추를 풀고 몸을 휘청인다. 그 사이에 일을 마친 기녀들이 하나씩 들어와 방을 가득 매운다.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어린 기녀들을 맞으며 "어서와, 어서와." 손짓을 하는데 마치 이 자리를 끝으로 작별하겠다는 시늉이다. 그는 기녀들에게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게 하고 가야금을 타게 한다. 앵무 아주머니도 일어나 춤을 춘다. 술에 취했으나 여전히 고운 자태를 잃지 않은 채 빈 손으로 검무(劍舞)를 했다. 조령(鳥嶺) 아래를 통틀어 그녀의 춤은 압권이다. 처연히 바라보던 석재의 눈빛에 생기가 반짝 돋는다. "상해에서 말이오. 운미공의 집에 나라 잃은 서화가들이 모여 이렇게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지요." "선생님께서는 무슨 시를 지어셨습니까?" "나요? 음.....퉁소 소리 끊어져 빈 담에 몸을 기댔네,(玉簫聲斷椅空墻)라 했지요." "호호, 선생님. 그건 앵무의 시가 아닙니까? 빈담에 기댄다(椅空墻)는 것은 사랑을 잃은 남자를 가리켰지요." "하하, 사랑하는 남자나 사랑하는 나라나 다 뜻이 통하지." 술 취한 석재가 크게 웃는다.

무릎을 안고 앉아 있는 어린 기녀들은 앵무 아주머니와 석재가 주고받는 희롱에 경탄하는 표정이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달성 앵무와 선비의 시담(詩談)을 눈앞에서 보듯이 배시시 웃는다. 도화라는 기녀가 만나기로 약조한 선비가 오지 않아 담에 기대서 기다렸다는 시를 앵무가 먼저 짓고는, 나중에 다른 시에서 한 선비를 '의공장'(椅空墻, 빈담에 기댐)이라고 별명을 붙여 놀렸다는 이야기였다. 기녀들은 아름다움과 자태, 시와 노래를 가지고 있어서 권력을 휘두르는 대감도 두렵지 않았다. 이제 그런 시절은 오지 않을 것이다. 방에 모인 어린 기녀들도 그것을 예감한다. 교묘한 비유로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한시도 필요 없을 거다. 잡가를 부르거나 유행가 한곡이면 될 것이다. 사내들도 시흥(詩興)을 알지 못하니 남녀 사이에는 몸뿐이지 않는가.

그런 생각에 어린 기녀들도 주는 잔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청해서 일어나 가사(歌詞)를 부른다. 하지만 아무도 잡가 따위는 부르지 않는다. 아직은 지조 있는 기생이니까. 두 번째 들어온 술 항아리가 비워졌을 즈음이다. 한 아이가 부르는 '어부가'를 듣다말고 석재가 대뜸 소리를 지른다.

"붓이 있느냐?" "예, 선생님. 여기 있습니다."

누군가 비켜 앉으며 등 뒤로 밀쳐둔 벼루를 내보인다. 마침내 석재가 휘호라도 할 기색이다. 기녀들이 눈을 번쩍 뜨고 숨을 죽인다. 벼루가 방 한가운데로 옮겨지고 석재가 몸을 일으킨다. 아까 펴놓았던 백당지는 보이지 않는다. 늦게 들어온 기녀 아이들의 엉덩이에 깔려 찢긴 채 구석에 박혀 있다. 누군가 벽장에서 종이를 꺼내려고 일어서자 석재가 손사래를 친다.

"종이 찾을 거 없다."

"선생님. 먹도 거의 굳었습니다."

"흥, 굳은 먹을 초묵(焦墨)이라 하지."

석재는 붓에 뻑뻑한 먹을 묻히며 "오늘 누가 속치마를 내놓겠느냐" 하고 기녀들을 둘러보았다. 아까 먹을 갈 때 이런 사태를 마음에 두었던 금릉이 쪼르르 나선다. 금릉은 자색 치마를 걷고 흰 속옷을 내보인다. 몇이 금릉을 도와 치마를 팽팽하게 당기자 제법 종이 같다. 석재가 치마에 붓을 댄다. 석재의 난(蘭)과 죽(竹)은 유명했다. 으레 난을 치겠지. 난은 여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석재의 붓에서 흘러나온 것은 뜻밖에도 대나무다. 그것도 곧은 대나무가 아니라 활처럼 대가 휘어지고 이파리도 몹시 한쪽으로 쏠려 있다.

"풍죽(風竹)이다."

가만히 건너보던 앵무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선생님. 풍죽은 처음 봅니다. 몽고족에 나라를 잃고 은거했던 송나라 소남(所南, 정사초)이 그린 노근란(露根蘭, 망국의 비탄을 담은 뿌리가 드러난 난초)과 같은 이치입니까?"

"이 아이들 마음을 그린 겁니다."

석재는 어린 기녀들을 둘러보며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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