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지혜로운 청산

르노와 닛산'미쓰비시 자동차를 총괄하는 카를로스 곤 회장은 '코스트 커터'(Cost Cutter)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1999년 파산 직전의 닛산 재건에 나선 그는 효율적인 비용 관리를 강조한 인물이다. 그는 관계와 평판, 절차 등을 중시하는 일본형 비즈니스 모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닛산 재생계획'으로 불린 과감한 구조개혁과 원가 절감만이 닛산을 살리는 길이라고 봤다.

또 다른 별명도 있다. '세븐일레븐'이다.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한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하지만 세븐일레븐에는 다른 뜻도 있다. 그는 임직원과 늘 소통했다. 사장 집무실뿐만 아니라 전화'이메일 등 소통 수단을 언제든 활짝 열어놓았다. 24시간 늘 열려 있는 편의점처럼 편하고 친근한 이미지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초기 지지율이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높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취임 한 달을 앞둔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84%다. 60대 이상, TK만 빼고 골고루 80% 이상 지지를 얻은 셈이다. 국민이든 참모든 야당이든 가리지 않고 적극 소통하려는 문 대통령의 스타일과 노력의 결과다. 야당과 언론에서는 '얄밉도록 국정 운영을 잘한다'느니 '인사가 응큼하다'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렇다 보니 문 대통령에게 '세븐일레븐' 별명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일부에서는 측근 2선 후퇴나 MB'박근혜정부의 인재 등용 등 문재인식 인사를 탕평과 파격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임명권자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일이나 그게 상식이고 정상이다. 역대 정권이 국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다 보니 새 정부의 인사가 두드러져 보인 탓이다. '정부는 유한해도 국가는 영원하다'는 문 대통령의 말에서 그가 생각하는 국가 경영의 기초를 읽을 수 있다.

아야 소피아 바실리카는 이스탄불의 명소다. 4세기에 처음 세워진 기독교 건축물로 '거룩한 지혜의 대성당'이라는 뜻이다. 숱한 지진과 반란으로 여러 차례 개축과 보수가 이뤄지다가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된 때가 537년이다. 거대한 돔 지붕은 지금도 불가사의다. 돔을 떠받치는 107개의 기둥 상당수가 그리스의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의 기둥이다. 신전을 허물고 그 기둥을 그대로 가져다 세운 것이다.

1453년 5월 아야 소피아는 새로운 운명 앞에 섰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리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때문이다.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지난 1천 년간 기독교의 상징이었던 아야 소피아를 파괴하지 않았다. 성당 바깥에 4개의 미나레트(첨탑)를 추가하고 모스크로 탈바꿈시켰다. 모자이크나 프레스코 벽화도 뜯어내지 않고 회칠로 덮고는 이슬람 사원으로 활용했다. 토인비가 말한 '팍스 오토마니카'(오스만의 평화)를 아야 소피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오스만은 공정하고 온건하게 제국을 지배했다.

지난 한 달간 문재인정부가 보여준 국정 방향과 인사에서 이와 비슷한 면모를 찾을 수 있다. 사드 보고 누락 조사나 4대강 사업, 방산 비리 감사 지시처럼 성급한 결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절제하고 기다리는 지혜도 강하다. 보수 9년 '정치 빙하기'가 만들어놓은 두꺼운 얼음은 결코 하루아침에 녹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의 최고 경영자는 변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국가에 있어 대통령은 단순히 최고 권력자가 아니다. 국가를 경영하고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문재인정부는 국가 경영의 한 방식으로 적폐 청산에 초점을 두고 있다. 구습을 걷어내고 사람을 바꾸는 것만이 청산은 아니다. 지킬 것은 지키고 우리 사회에 더 좋은 구조를 고정시켜야 진정한 청산이다. 잘못된 관행은 기득권을 용인하는 통로가 되고 결국 특권 의식으로 굳어지기 마련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소수의 특권과 다수 국민의 불행이 짝을 이루는 현실이다. 새 정부는 지혜로운 청산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 된다. 그것이 문재인정부의 과제이자 남길 유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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