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진석의 老莊的 생각] <7>'정해진 마음' 장례 지내기

"달라진 상황에 다르게 반응하지 못하면 비웃음만 살 뿐"

삽화:화가 송필용
삽화:화가 송필용 '흐름'

어떤 모임에서나 앉자마자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촌스럽다. 무지하고 강박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을 선(善)으로 확신하고 들이미는 행위다. 신념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전인격으로서의 자신은 뒤로 감추고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큰 실례다.

보통의 경우 정치와 종교를 주제로 하는 대화에서 논리적으로 합의점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합의점을 찾았다면 아마 논리 너머의 다른 어떤 요인들이 개입되어서일 것이다. 정치와 종교는 기본적으로 신념의 활동이다. 매우 세련되고 현란하며 또 권위까지 갖추고 있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게다가 보편성으로 해석될 무늬의 외피까지 두르게 되었지만, 일상 안에서는 신념의 차원을 넘지 못한다. 가끔 정치와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 가운데 높은 차원의 포용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분명히 자신의 신념을 조금이나마 양보했을 때다. 신념은 각자에게 진리다. 진리를 양보하고 마음 편할 수는 없다. '자기 진리'를 양보하고 여유로울 수 있는 것, 아마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일지 모른다.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 모두 순교자가 있고 또 그들이 떠받들어지는 한 그것들이 강력한 신념 체계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신념이 맹목적인 방향으로 자가발전하면 타협이 원천 봉쇄되는 근본주의로 흐른다.

그런데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거수일투족은 다 정치 행위다. 말 한마디도 모두 정치 행위다. 상황을 자신의 의지대로 끌고 가려는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한 이 정치 행위를 벗어날 수 없다. 삶이 정치 행위라면 인간은 모두 크거나 작거나 혹은 강하거나 약하거나 하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각자의 신념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판단 기준을 갖는 것이다. 이것을 장자는 '정해진 마음'(成心)이라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정해진 마음을 스승처럼 모시고 산다. 현자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 똑같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정해진 마음을 기준으로 해서 시비 판단을 한다. 그래서 정해진 마음이 없이 시비 판단을 한다는 말은 오늘 월(越)나라로 떠났는데 도착은 어제 했다는 말만큼이나 이치에 맞지 않다."(『장자'제물론』) '정해진 마음-시비 판단-정치 행위-삶'이 하나의 유기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삶의 형태에서라면 어떤 합의도 애초에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각자의 기준은 각자에게 진리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말하는 장자의 얘기를 들으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나와 당신이 논쟁을 한다고 합시다. 당신이 나를 이기고, 내가 당신에게 졌다면 당신은 옳고 나는 틀렸을까요? 내가 당신을 이기고 당신이 졌다면 내가 옳고 당신은 틀렸을까요? 한쪽은 옳고 다른 쪽은 틀린 경우일까요, 아니면 두 쪽 다 옳은 경우일까요? 두 쪽 다 틀린 경우일까요? 이런 일은 둘 다 알 수 없소. 제3자는 더 알 수 없소. 그렇다면, 누구를 불러 이를 판단하게 할 수 있겠소. 당신과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한다면, 그는 당신과 같으니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없소. 나와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나와 같은 입장이라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 둘 모두와 입장이 다른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그는 나하고도 다르고 당신하고도 다르니 역시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소. 우리 둘 모두와 입장이 같은 사람을 불러 판단하게 하면, 그는 우리 둘 모두와 같기 때문에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소. 그렇다면 나도 당신도 그리고 제3자도 모두 공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는 거요. 그런데 누구에게 기대한다는 말이오?"(『장자'제물론』) 이처럼 '정해진 마음'에 갇혀 사는 것이 세상 속 인간이다. 이 '정해진 마음'을 치장하는 데 거의 대부분을 쓰는 존재가 또 인간이다. 자신만 모른다. 이 '정해진 마음'을 치장하며 사는 한 자신은 한 곳에 뿌리를 내린 결박된 존재가 되고, 자신이 하는 일은 대부분 과거를 지키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어쩌랴. 새롭고 신선한 일은 죄다 자신의 '정해진 마음'에서 이탈해서야 가능한 일인 것을….

한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내달리던 토끼가 밭 가운데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는 것을 보았다. 죽은 토끼를 주워 집으로 돌아온 농부는 그 다음 날부터 농사는 짓지 않고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또 그런 토끼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하지만 그 뒤로 한 마리도 보지 못하고 결국에는 온 동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말이 출현한 이야기다.

어떤 검객이 배를 타고 양자강(陽子江)을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강 중간쯤에서 물결이 크게 출렁거리던 차에 차고 있던 칼이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놀란 검객은 급히 작은 단도(短刀)로 칼을 떨어뜨릴 때 앉아 있던 뱃전의 한 곳에 표시를 하였다. "이곳이 칼을 떨어뜨린 곳이다." 건너편 나루터에 도착하여 여유가 생기자 검객은 칼을 찾기 위해 뱃전에 표시한 바로 그 밑의 물속으로 들어갔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말로 회자되는 고사다.

이 두 고사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비웃음을 사지 않을 수 없다. 비웃음이라는 것은 어디서 오는가. 바보 같은 상황에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어떤 고정된 행위를 벗어나지 못하면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다. 달라진 상황에 다르게 반응하지 못하고 계속 같은 반응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도 같은 일이다. 다른 시대에 다른 비전을 생산하지 못하고 고정되고 철 지난 틀로 새 시대를 맞자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웃음이 비웃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비웃음을 사는 행위 때문에 비효율이 발생해 힘 자체가 빠지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처럼 '정해진 마음'은 한 번 토끼를 얻은 기억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박혀서 계속 토끼만 기다리게 한다. 토끼를 기다리는 동안 이 농부는 어떤 생산 활동도 하지 못한다. 막연한 심리적 기대가 객관적 사실로 착각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토끼를 주워서 먹을 수 있다는 기대와 확신이 너무 커서 지금의 배고픔을 불평할 틈도 없다. 다른 모든 사람이 그러고 있다가는 굶어 죽을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무지하거나 사악한 부류로 몰아붙이기까지 할 것이다. '정해진 마음'에 지배되는 상태가 되면, 그 사람의 온 마음과 행동이 이 '정해진 마음'의 변주에 불과해진다. 한 사람이 하는 모든 심리적 활동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로는 '심리적 기대'와 '심리적 확신'인데,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다. 이처럼 '정해진 마음'은 한 사람을 과거에 묶어두고,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토끼를 기다리는 이 농부의 이야기는 『한비자(韓非子)』의 「오두(五蠹)」 편에 나오는데, '오두'는 나라를 망가뜨리는 다섯 종류의 '좀벌레'를 말한다. 즉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 가지 요인이라는 뜻이다. 비효율적으로 운용되는 나라에서는 심리적 기대와 객관적 사실을 혼동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우리 경제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몇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07년에 2만달러대에 진입하고 나서 선진국 진입의 경계선으로 여겨지는 3만달러의 벽을 여태껏 넘지 못하고 있다. 심한 정체에 빠져 있다. 무엇이 정체되어 있다는 것은 새로움이 시도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과 같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선진국 진입을 기대하면서 중진국에 이를 때 사용하던 방법을 계속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한다. 게다가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이르는 일과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후진국에서 중진국에 오르는 일은 선진국에서 먼저 닦아 놓은 길, 즉 있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은 없는 길을 열면서 가야 한다. 있는 길을 가는 것과 없는 길을 열면서 가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뱃전에 긁어놓은 표식만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가는 자신이 배를 타고 얼마나 흘러왔는지를 망각한다. 이 망각은 사람을 맹목적인 상황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

'정해진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염치(廉恥)가 없어진다. '정해진 마음'이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는 덩어리가 크면 클수록 '정해진 마음'이 주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정해진 마음'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자 진실을 지키는 일로 바뀐다. 따라서 아무리 크고 중한 일이라도 그것이 '정해진 마음'을 발휘하는 데 방해가 되면 바로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럴 때 사용하는 비굴한 논리들은 모두 상황을 상대적인 묘사 속으로 끌고 간다. "다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덜하다"고 하거나 "나만 그런 것이냐"고 하는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남보다 더 낫기만 하면 된다는 종속적 사고에 빠져 있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남보다 더 나은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남과 다를 뿐만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것이 있어야만 만족할 것이다. 비굴한 논리를 사용하는 것도 자신을 자신의 존엄 위에 세우지 못하고 '정해진 마음' 위에 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불행하게도 염치를 잃어버린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일이 있다고 하자. 법을 어긴 사람을 법무장관으로 추천하고, 악의적 표절을 한 사람을 교육부 수장으로 추천한다. 법무장관은 법을 관장해야 하고, 교육부 수장은 표절을 하지 못하도록 감독해야 할 직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한 사람들이나 추천된 사람들이나 모두 아무렇지 않은 양 당당하다. '정해진 마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말한 원칙을 스스로 깨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소위 '정치'를 버리고 '정치 공학'을 선택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해진 마음'을 공유한 사람들은 객관적 비판 능력보다는 감성적 동질감에만 의존하면서, 갑자기 호위 무사로 등장한다. 자존감이나 품격이나 진실성은 사라진다. 오직 '정해진 마음'들의 굳건한 연대만 남는다. 참 무섭고 슬픈 일이다. 이처럼 무섭고 슬픈 풍경 안에서 아무도 몰래 비효율은 두꺼워진다. 우리가 '정해진 마음'에 좌우되는 감정을 극복하고 과학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정해진 마음'에 갇힌 자기를 장례 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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