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끽다거

우리 일생이 좋은 벗과 차 한잔 마시는 일과 다름 아니다. 어제 만난 사람도 오늘 처음 본 사람도 함께 차 한잔 마신다.

화산 인각사에 갔다. '즐겁던 시절 자취 없이 가버리고 시름에 몸 늙어, 한 끼 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나. 인간사 이야기 꿈결인 줄 내 이제 알았으니' 일연 스님의 밥 시다.

한 잔의 차와 한 끼의 밥은 더운 숨을 고르게 하고 더위를 멈추게 한다. 7월의 태양은 나무들을 성장시키고 건강한 숲을 이룬다.

차를 마신다. "일찍이 여기에 와 본 적 있는가. 예, 와봤지요. 그러면 차 한잔 마시게나. 또 찾아온 스님에게 여기 와 봤는가. 아니 처음입니다. 그래 차 한잔 마시게나. 원주가 조주 선사에게 되물었다. 어째서 왔던 사람이나 처음 온 사람에게 차 한잔 마시라고 하십니까. 그려 너도 차 한잔 마셔라." 조주 선사의 끽다거 법문이다.

차를 마시는 것은 목이 말라서가 아니라 맑음과 고요 속에 파적(破寂)이 있기 때문이다. 산중에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차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쁜 세상에 무슨 한가한 이야기이냐며 비난할 수도 있다. 한잔의 차가 우리 앞에 오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숨은 공덕이 있다.

우리가 본 하동이나 보성 차밭들, 그리고 여행 중에 만난 윈난이나 시즈오카 다원들은 우리 정신문화의 일단에 차가 자리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차 씨앗을 가져와 심은 사람이다. 두 번째는 찻잎을 한 잎, 두 잎 가려서 정성껏 만든 사람이다. 세 번째는 그 차를 마시고 즐겼던 사람이다. 네 번째는 흙으로 다기를 구운 사람이다. 다섯 번째는 차의 정신을 기리고 찬양한 사람이다. 여섯 번째는 맑은 물과 신성한 불을 보전한 사람이다. 일곱 번째는 햇볕과 바람의 공덕이다.

이처럼 우리가 알게 모르게 먹고 마시는 한잔의 차와 공양에는 시주의 공덕이 배어 있다. 그 은혜의 시간들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태어나서는 부모에게, 성장해서는 스승에게, 죽어서는 후손에게 은덕을 입는다. 그림자는 자신을 이끌고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인생을 살며 이웃과 사회생활에서 유형무형의 도움을 받고 주게 된다. 어제는 과분한 선물을 받게 되었다. 좌식생활에 익숙한 산중습관은 기도하거나 차를 마실 때 가부좌하고 지내게 된다. 여름 한날 집 가운데 너른 마루에 테이블이 들어왔다. 의자 네 개에 삼단으로 된 접이식 테이블은 공간도 활용되는 엔틱 목가구였다. 의자에 앉아서 책도 읽고 차를 마시니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어린아이처럼 자주 책상을 어루만지게 된다. 좋은 일은 늘 경계할 일이다. 앙산 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언제나 부엌에서 공양주 소임을 하며 대중의 궂은 일을 자처하였다. 누가 만류하면 "저는 지금 소가 채소밭으로 달려가지 않도록 고삐를 힘껏 잡아당기는 중입니다"하고 겸손해했다.

알고 보면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일상이 수행자의 삶이다. 상호 간에 기적을 만들고 나이를 들어감에 성숙되어 지는 것이다. 그 반대로 어른이 되어도 몸만 커진 어린아이 같은 사람도 있다. 그 아이가 자신이 되기도 한다. 나 자신의 많은 것을 명함에 적고 이력서에 나열해도 직책이나 명예는 나를 속이게 될 때가 있다. 우리들은 아직도 그림자 속에서 속고 있으며 진정으로 자신과 만나야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처음 만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판단과 기억은 정보가 불필요하다. 그래서 처음 본 사람이나 오래된 사람이나 차를 마신다. 이제 그림자 노동은 개인에서 사회로 확대되어야 한다.

"아난이 세존에게 여쭈었다. 저는 절친한 도반이 항상 곁에 있고 세존을 평생 모셨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공부도 반이나 이뤘습니다. 아니다. 나도 너의 도반이다. 너는 이미 다 이루었다."

좋은 도반은 스승과 같고 훌륭한 스승은 친구와 같은 것이다. 우리들은 좋은 친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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