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무거운 것에서 사소한 일상으로

신비한 저녁이 오다

"이젠 아침, 점심보다 저녁이 더 익숙해지네요. 석양 무렵 떠오르는 소소한 일상들을 시로 정리해 봤습니다." 네 번째 시집을 펴낸 강문숙 시인.

'네 번째 시집을 엮는다/ 또 말에 빚진다/ 또 라는 말에는 뒤끝이 있다/ 잡고 늘어져 쉽게 놓지 않는/ 내 생애의 단애가 오롯이 담겨 있다'-하략.

강문숙(62) 시인이 네 번째 시집을 냈다. 표제시 '신비한 저녁이 오다'는 집안일로 경기도 일산에 잠시 머무를 때 그곳에서의 단상을 간략한 시어로 정리한 것이다.

작년에 시인은 환갑을 넘겼다. 자연력(歷) 62세인 시인의 삶은 환희로 빛나는 일출보다, 정염으로 불타오르는 정오의 햇살보다 노을진 석양에 더 가깝다. 누가 그녀를 저물녘 베란다 간이의자로 이끈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녀의 눈빛은 '신비한 저녁'을 응시하고 맘 끝은 '사소한 일상'을 따라 움직인다.

◆네 권의 시집마다 삶의 이력'발자취=강 시인은 모두 네 권의 시집을 냈다. 유년 시절부터 시작한 시작(詩作)은 각각의 책마다 삶의 이력과 발자취를 담고 있다.

첫 시집 '잠그는 것들의 방향은?'엔 등단 초기 세상을 바라보는 순수한 시선이 담겨 있다. 내 시가 활자가 되어 나왔다는 자부심에 세상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아름다움을 좇았고 표상적인 의미를 추구했다. 그런 충일한 의식의 흐름이 모두 시로 피어났다.

두 번째 '탁자 위의 사막'은 그녀가 힘들 때 세상에 나온 시집이다. 어느 날 큰 병이 몸에 찾아들었고 이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그 충격을 병상에서 한 줄 한 줄 옮겨 놓은 것이 이 책이다. 세 번째 시집 '따뜻한 종이컵'은 개인적 불행에서 조금 벗어난 후 안도의 숨길로 기록한 시들이다. 병에서 놓여나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아팠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시구처럼 세상은 모두 앓고 있었고 그런 상념들이 행간을 채우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경전을 만든다"=시인은 가장 좋아하는 동사(動詞)가 '무너지다'라고 말한다. 이 무너짐은 '낮아짐'을 거쳐 사랑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런 무너짐의 연속에서 어느 정도 놓여나자 시인은 타자(他者)의 입장에서 삶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서 작고 여린 것 중 아프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우리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방황할 때 한걸음 물러서 희망을 향해 나가도록 이끌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시의 역할이구나라는 것을 느낀 거죠." 4집에 이르러 그녀의 시는 사랑과 회복으로 나아갔다.

누구든 삶의 과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들과 만난다. 시인은 그런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아낸다면 그것이 개인의 경전(經典)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자신의 경전을 가지고 있어요. 가장 높이 올랐던 성취부터 가장 숨기고 싶은 치부까지. 지금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나 웃음은 모두 경전의 자구(字句)나 단락으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소소한 것들에 대한 간절함=해설을 쓴 손진은 경주대 교수는 그녀의 시를 '소소한 것들에 대한 간절함'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런 의식은 시 '생활의 발견'에서 분명해진다.

'분명해지던 사람들의 찬란함이 스스로 제 몸의 윤곽을 지울 때까지가/ 생활이다/ 생활은 이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소소한 것들의 소리를 귀담아듣는 일이다'.

시인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제 몸의 윤곽을 지우는 존재들을 체득한 것은 그녀가 '소소한 것들의 소리를 귀담아들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제 시인은 무겁고 큰 주제들을 내려놓고 일상의 소소함으로 내려왔다고 말한다. 인터뷰에서 강 시인은 "작은 들꽃을 봐도 눈물이 핑 돈다. 여기에 우주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에 우리의 삶이 더 간절해진다"고 말미를 지었다. 5집에서 시인의 시 세계는 어떻게 진화할까. 벌써부터 궁금증이 인다. 126쪽, 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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