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남
해가 바뀌었다. 1973년.
1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휴전 날짜가 며칠 뒤에 조인된다고 하다가 또 며칠을 연기했다는 등 온갖 어수선한 분위기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조만간 휴전은 성립될 것이라는 전망 아래 각 부대는 조금씩 장비들을 짐으로 꾸리기 시작했다.
휴전이 조인되는 그날로부터 단 두 주일 이내에 모든 연합군은 각기 제 나라로 철수를 끝마쳐야 한다는 협정조항 때문에, 여차하면 하루 만에라도 자리를 정리하고 깨끗이 떠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또 하나, 작년에 철수하면서 적으로부터 기습받아 크게 피해를 입은 청룡부대의 전례에서 보듯이, 자체방어능력과 경계태세도 한층 더 강화해야 한다는 명령이 계속해서 하달되고 있었다.
휴전이 결정되는 그 시간, 현재 차지하고 있는 그 땅이 자기의 영역이 된다는 사실 때문에 양측은 휴전 이전에 더 많은 지역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갑자기 월남 전역에서 계획되지 않은 산발적이고 규모를 알 수 없는 치열한 전투가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하 조직으로 은거만 하고 있던 베트콩들도 마을 단위마다로 침범해, 그 마을을 자기들의 사상권으로 확보하려고 했다. 자유 월남 정규군들은 이들을 막고 현재의 위치를 안정화하려고 다급하게 노력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형태로 전투 상황이 벌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마을마다 크고 작은 전투가 어느 때보다도 급박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무전기를 통해서 사방에서 정신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1월, 그리고 하순.
휴전 조인이 오늘내일하는 가운데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벌집을 쑤신 듯한 소란은 마을뿐이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작전 지휘권이 동결된 상태로, 철수 시기까지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하루 종일 주야간 주위 기지 경계로부터 적의 산발적인 공격에 대비하는 준비를 해야 했다. 전 부대원이 하나같이 경계근무에 주력을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화랑기지의 2소대에서 다급한 보고가 날아왔다. 바로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작은 부락에서 초저녁부터 월남 정부군 민병대인 PF와 베트콩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지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각 기지마다 주야간 어느 한순간 방심할 수 없을 정도로 적 특공대인 셰이퍼의 침투와 최후공격의 사전 차단을 위해 엄청난 양의 위협 사격을 사방으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호네오산 주위의 밤하늘은 금방 휘황찬란한 장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966포대의 155밀리를 중심으로 각종 중포들, 51포대의 105밀리 그리고 전 사단 위수 중대와 각 초소는 숨죽이듯 침묵과 어둠으로 뒤덮여 있는 암산 호네오를 향해 거대한 불덩이를 일제히 토하기 시작했다. 막강한 위협 사격의 표적이 되는 호네오산은 수백 리 주위가 말 그대로 찬란한 백야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우렁찬 폭음과 함께 개당 수만 촉광을 발하는 중포로 띄워진 조명탄들이 온 하늘을 불태울 것같이 삼사십여 발이나 계속해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작은 나뭇가지의 흔들림 하나까지도 뚜렷이 눈에 보일 것 같은 밝디 밝은 조명탄 불빛 아래 온몸에 사격을 받는 산 호네오는 꿈틀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기슭에서 정상까지를 V자형으로 온 산을 가로지르며 버섯 모양의 형태로 연기를 피워 올리는 새하얀 뭉게구름의 WP연막탄, 바위를 으깨고 나무둥치를 날려버리는 번쩍이는 섬광을 동반하고 우렁찬 폭발음은 메아리로 되돌아와 가슴을 울려 숨을 저리게 하는 무서운 위력의 고폭탄, 잘 계산된 수치로 포구에서 벗어나 땅에 닿기도 전에 공중에서 스스로 폭발해 찬란한 불꽃을 뿌려 내리는 시한 신관의 폭뢰들……. 그리고 가로로 쏟아지는 빗줄기같이 수없이 뻗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핏빛같이 붉은색 예광탄 흔적들.
저 요란하고 찬란한 섬광의 신호탄, 조명탄과 더불어 끊임없이 뒤섞이는 폭음들로 하늘과 땅이 온통 뒤바뀌는 웅장함이 연출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의 역사를 압축한 한 단면을 보고 있지 않은가. 오늘 이곳은 이름뿐인 '월남'이 아니라 뜨거운 젊은 피와 마음까지 응축된 뜨겁고 뜨거운 '열남'(熱南)인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는 이 순간을 찬란하게 사는 것이다.
총구가 열을 받아 희뿌옇게 변색될 때까지 신나게 자동연발로 불을 뿜다가 푸른 신호탄에 맞추어 사격을 일제히 중지했다. 탄창을 바꾸어 끼우며 총열을 식히기 위해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 호네오산을 스스로 감격한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마주 보고 섰다. 어디선가 가볍고 맑은 도마뱀 울음소리가 가을밤 귀뚜라미 소리처럼 우리네 마음을 가만가만 식혀주고 있었다.
1월 28일 밤.
내일 아침 9시면 전 월남 땅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전투가 그 위치에서 고착되고 휴전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서로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예상되고, 오늘 밤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힘겨운 고비가 될 것이라고 짐작했다.
마을마다 전례 없이 높다랗게 월남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고 밤이 되도록 그 깃발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 땅은 전국이 전선 없는 전장이므로 내일 아침까지 어느 틈에 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월맹기가 게양될지 모르기 때문에 최소한 내일까지는 아무도 마을의 깃발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월남의 밤은, 특히 그 짙은 어둠은 항상 두려움의 빛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꿈에도 그리던 고국
참전기장과 기장증이 나왔다. 주월 사령관과 국방부 장관 이름으로 종군기장 수여 확인증과 기장증, 그리고 가슴에 패용할 수 있는 메달이 달린 기장이 개인별로 지급되었다. 나는 부대에서 가장 오래된 고참이라는 이유로 소대원들이 갹출해 거둔 돈으로 백마부대 마크가 담긴 개선축하 상패도 받았다. 내 삶의 한 기간을 증명하는 이정표인 셈인가.
철수 날짜가 정해졌다. 우리 중대의 출국일은 2월 16일이었다. 휴전 발효일까지도 가장 위험한 상황에 있던 1대대 요원부터 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적과 접전 중이라 기지 정리를 제대로 할 수도 없다고 했다. 대형 시누크가 총동원되어 한꺼번에 공중으로 들어 올려 공수해 바로 나트랑 비행장까지 날아가 버렸다고 했다. 이곳에서 활용하던 모든 무기류들은 모두 월남군에게 물려주기로 했으므로 지급된 개인 사물들만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지에는 우리 한국군이 생활했다는 한 점의 흔적도 남기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벽에 그어졌던 한 자의 낙서도 한 토막 쓰레기도 남기지 않기 위해 세밀한 주의를 기울이고 주변을 정리해 나갔다.
월남 정부군이 우리 기지를 인수받으러 왔다. 월남 정부군에게선 군인으로서는 무언가 허술한 느낌을 항상 받는다. 이 나라는 군인 계급이 가장 귀족 계층인데도 무언가 빈약함을 내뿜는 인상은 어쩔 수가 없다.
내 첫 파월 초년병 때 우리의 용마기지를 저들에게 넘겨 모든 장비와 시설들을 고스란히 인계하고 떠나왔다. 그렇게도 가꾸고 아끼던 기지는 인계한 지 단 일주일 만에 베트콩의 공격을 받아 힘없이 내줘 버리고 월남군은 도망가버린 전례를 우리는 듣고 보았다.
우리의 정성과 땀방울을 흘려 만들고 가꾸던 자랑스러운 용마기지의 이름을 추락시키고 우리가 피 흘려 확보해온 치안을 하루아침에 허물어 버린 저들 아닌가. 그러고도 또다시 연대 수색중대의 피나는 탈환작전 끝에 다시 어렵게 되찾아 넘겨주었다.
항상 초원을 이동해 다니는 화전민들처럼 자기 가족 전체를 군식구로 줄줄이 꿰어차고 훈련장까지도 달고 다니는 이들의 군대 생활이 오늘의 현실이다. 병영 생활의 엄격함과 질서를 이들은 아직도 제대로 모르고 산다.
더블백, 배낭 그리고 철모와 M16 소총만을 휴대한 채 연대로 내려와 집결한 것이 2월 13일이었다. 마지막 정리를 서둘렀다. 행여 철수하는 우리 부대의 뒷머리를 공격당하지 않을까 해서 많은 양의 실탄과 휴대 소총만은 이 땅을 이륙할 때 저들에게 인계하기로 했다.
연대 PX도 이미 철폐해 버려 월남 아가씨들이 경영하던 구내 민간인 매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그래도 여기는 타국이 아닌가. 외국생활에 형제나 친구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정표로 주고자 가진 돈 전부를 털어 액세서리 같은 조촐한 기념품들을 구입했다. 값으로 따져서 몇 푼 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것을 받을 누이야 동생들아, 그 값어치보다도 이렇게 너희를 생각하며 준비하는 내 작은 정성을 알아주길 바란다. 이 기념품을 주고받는 기쁨 속에서 작은 즐거움이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행여 어린 내 누이들 마음에 월남에 가면 큰돈을 벌어서 돌아온다는 잘못된 기대를 갖지 않기를 바란다. 나 스스로에게도 의롭지 못한 물질을 착복하지 않았다는 부끄럽지 않은 마음이면 족한 게 아닌가. 그리고 아직도 생활의 기반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서울의 형님께 그동안 몇 푼씩이나마 작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도 또 고국엔 얼마만큼의 의무적인 적금도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누이야 난 이것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1973년 2월 16일 오후 2시.
우리가 타야 할 DC 10여객기가 미끈하고도 멋들어진 거대한 위용으로 멀리 하늘 한쪽에서 나타났다. 멀리서부터 엔진마저 꺼졌는지 소리도 없이 그 큰 기체를 유연히 돌리면서 내려앉는 모습은 힘차게 날아오르고 내리는 커다란 백조를 보는 듯했다. 이제 드디어 이 나라 이 땅을 떠나는 것이다.
약 17개월여, 그동안 이 땅에서 살아온 내 이국 생활을 지금에야 모두 마무리 짓고, 꿈에도 그리던 내 조국 내 나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의 염원에 힘입어 이렇게 무사한 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7개월이란 약 500여 일쯤 되던가.
우리가 탄 비행기가 굉음을 뿜으며 날아올랐고,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는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 제주도 상공입니다' 하는 한국인 승무원의 안내 방송이 있고부터는 잔잔히 울려오던 엔진음도 어느덧 단절되어 버리고 그저 조용한 침묵만이 존재했다. 또 기체의 하향을 느낄 수 있는 기압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여기가 내 나라 내 조국의 하늘이다. 17개월여, 일생을 살다 보면 그렇게 긴 세월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 출발하면서부터 어쩌면 다시 밟을 수 없는 땅일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떠나갔던 곳이다. 그동안의 이국 생활 어느 한순간 내 나라, 내 땅 또 내 고향 그리고 내 벗과 형제들이 그립지 않던 날이 없었다. 이제 곧 그토록 소망하고 바라던 내 나라 땅을 밟을 수 있고 다시 우리 땅 위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다는 것이 이토록 큰 기쁨이다. 이렇게 내 조국에 다시 돌아온 만큼 앞으로 내 인생에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겠지만 내게 주어진 삶을 더욱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내가 태어남을 받았고 내 뼈를 굵게 한 내 고향 내 부모 형제들이 있는 곳이라면 무언가 조상으로부터 연결되어질 영험이 내 생의 태초부터 나를 감싸고돌던 곳. 내게 정해진 운명 속에서 나 기쁘고 열심히 살아가리라.
저 발아래 지표엔 나와 내 이웃의 살림살이만큼이나 헐벗은 붉은 산도 있을 것이며 세계가 놀라는 빠른 경제적 성장을 하고 있다는 우리나라의 발전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벽촌의 가난한 농가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 자신이 젊음을 바탕으로 힘찬 성장과 발전을 기대하고 꿈꾸는 것처럼, 내 조국과 내 이웃도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로 발전할 수 있는 푸른 잠재력이 있는 것이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트랩을 내려 디딜 때 가슴 가득히 와 안기는 내 나라 겨울의 차고 신선한 공기. 어깨를 펴고 힘껏 숨을 들이켜 심호흡을 해보았다. 항상 뜨거움과 찌뿌듯하고 우중충한 기후만 있는 나라가 아니라 내 나라는 이렇게 다양한 계절과 기후마저도 택함을 받은 축복의 땅이 아닌가.
이 신선한 맑음. 그래 누가 그랬던가. 비록 오늘같이 우리는 가난하게 살더라도 우리나라 우리 땅에서는 석유가 나서는 안 된다. 온갖 것이 죽고 썩혀진 기름 덩이가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나라의 공기는 이렇게 맑아야 하며 내 나라의 지하수는 방울방울 맑은 정기가 스며들어 있는 맑은 구슬처럼 영롱한 생령수(生靈水)만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에 탁함이 없고 하늘이 선택한 선민으로서 천혜의 계절과 풍성함 속에서 그 선한 자질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보라!
여기가 그런 내 나라가 아니냐.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다.
저 동해의 물이 마르고 그 많은 백두산 돌들이 풍우에 씻겨 닳아 없어지는 그날에 이르기까지 영위되어질 이 땅의 삼천리금수강산 꽃피는 옥토에서 나, 대한의 아들로서 영원히 그리고 힘차게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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